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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답은

〈카피레프트 프로젝트 ‘인간, 같은’〉(뒹굴 제작, 공동창작, 서울: 디스위켄드룸, 2018.12.26-30.)1 크레딧에는 “기타협력”이라는 타이틀로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 다른 멤버가 손으로 대강 그려둔 무언가를 디지털화하거나, 역시 다른 멤버가 구상한 소품 제작을 위한 기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노동력을 제공했다는 뜻이다. (뒹굴 멤버를 뜻하는 ‘뒹굴리언’ 명단은 실질적인 활동을 기준으로 하여 매년 갱신하는데, 2018년에는 여기에도 내 이름이 들어갔다. 하지만 다른 공연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기여를 했다.) 정가를 내고 티켓을 구매했는데, 왜 돈을 냈냐고 물어오긴 했지만 굳이 돌려주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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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그러니까 몇 안 되는 콜렉티브 뒹굴 멤버들은 아마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낯을 많이 가리지만 어떻게든 타인들에게 제 이야기를 하고 그들로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두고 그 앞에 설치한 무대 위에서 찧고 까불고2 할 수 있는 공연은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좋은 매체다. 대화라는 것을 위해 이들은 기껏해야 스무 명 정도 들어올 수 있는 공연을 꾸리기도 하고, 객석에 앉은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않다. 물론 선량한 관객들은 그들의 부름에 답하지만, 다른 많은 공연 혹은 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웃는 낯으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선물을 건네고 극장을 떠나곤 한다.

때로는 칭찬을 듣고 싶지만 때로는 질타 또한 받고 싶은 그들은, 그리하여 관객 명단을 뒤져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몇몇 사람들에게 연락해 시간을 청했다. 〈인간, 같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래서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캐물었다. 그 공연의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 하는 구체적인 평가들을 확인했다. 또한 겨우 한 해도 안 되는 시간동안 그 공연의 기억이 얼마나 희미해졌는지를 확인했다. 그 공연을 관람함으로써 공연 바깥의 어떤 것들을 떠올리고 고민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했다. 그런 대화들을 토대로 제작한 〈카피레프트 프로젝트 ‘인간, 같은’〉의 주를 이루는 것은 그래서, ‘공연’이기 이전에 ‘전시’다. 극장이 아닌 전시장으로 주로 쓰이는 공간을 빌려서는, 그런 대화를 기록한 영상들, 대화에서 언급되었던 사물들, 그리고 공연 소품들3을 전시했다. 공연 포스터에는 회차별 공연 시작 시각과 함께 전시장 개방 시간을 적어 두었다.

(이번 작업에서 전시와 구별되는) 공연이라는 것에는 “도슨트 퍼포먼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짧은 소리4 공연과 낭독극이 포함되어 있지만, 큰 얼개는 관객들을 이끌고 전시장을 돌며 〈인간, 같은〉 공연과 이후의 코멘트 수집 과정들을 설명하는 행위로 구성된다. 도슨트를 맡은 배우는 물론 〈인간, 같은〉에서 배역을 맡았던 이들이다. 미술관의 도슨트가 흔히 하듯, 이 도슨트는 〈인간, 같은〉의 ‘원작자’ ― 기억이 흐릿하지만 아마 “작가”라고 칭했던 것 같은데, 공동창작이라 할 만한 과정에 참여한 이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인지, 일단은 각본을 쓰고 장면을 연출하는 일을 맡은 성지수를 맡은 것인지 불분명하다 ― 의 의도를 설명하며 작업을 소개한다. 때로는 천재적이니 어쩌니 하는 말까지 섞어 가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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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같은〉은 복제 인간 기술이 상용화된 어느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5 〈카피레프트 프로젝트 ‘인간, 같은’〉을 관람하며 받은 안내문6에 따르면 “이 작품의 주된 소재인 복제인간(클론)에는 중첩적으로 의미들이 은유되어” 있어, 어떤 인간과 그의 복제 사이에서 형성되는 위계, 그것에 가해지는 질문들 등은 “삶과 역사라는 명료한 원본”으로서의 현실과 “그것을 복제한 허구의 세계”로서의 연극 사이에로 옮겨 진다. 〈인간, 같은〉의 구상 과정에서 ― 복제 인간 상용화 사회라는 상상적 대상, 혹은 그러한 상상이 지시하는 현재적 실재 양자로서 ― 참조되었을 원본, 그것을 토대로 구성된 허구로서의 〈인간, 같은〉, 그리고 다시 한 단계를 건너 만들어진 〈카피레프트 프로젝트 ‘인간, 같은’〉의 관계들이 무대 혹은 전시장에서 전면화되는 셈이다. 이 글은 “공연의 순서상 관객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관객의 이해’ 파트에서는 ‘진짜 나’라는 것에 대한 의심의 촉발을 다룬다. [〈인간, 같은〉의] 3장을 재구성하는 ‘관객의 기억’ 파트에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공연예술의 원본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며 다양한 레퍼런스와 함께 작품을 병치시켜 관객의 인식론적 충돌을 일으킨다. ‘관객의 감상’ 파트에서는 자조적인 질문들과 의미를 자아내기 쉽지 않은 사운드의 열거 속에서 관객 역시 의문에 빠진 채 ‘공연예술과 오리지널리티의 행방불명’에 대해서 자신의 답을 사유하고 표현하도록 한다.”는 말들로 〈카피레프트 프로젝트 ‘인간, 같은’〉을 설명한다.

각각의 요소들에 대해 완성도 정도의 말로 뭉뚱그려질 만한 무언가의 일정 수준을 갖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므로 볼거리들이 펼쳐지지만, 대체로 그것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일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거나 오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다. 한편으로는 〈인간, 같은〉이 당시의 관객들에게 제대로 각인되지 못했다거나 음악을 이룰 만큼의 피드백을 얻지 못했다는 치부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한편으로는 ― 영상 제작을 위해 만난 관객 인터뷰이를 그 공연을 평가할 만한 권위를 가진 거장으로 대우하며7 메이크업까지를 제공한다거나 예술은 수용자에게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둘러대는 대신 도슨트로 분해 스스로 설명하는 등의 방식으로 ― 몇 가지 관례들을 비틀면서 〈카피레프트 프로젝트 ‘인간, 같은’〉는 계속해서 질문을 시도한다.

아마도 그 질문을 허공에 던지고 끝낼 것이 아니라 직접 대답하는 이가 있기 있기를 바랐을 것이므로, 그들은 종이 한 장을 내민다.8 “관객 이해 능력 평가”라는 제목이 붙은 이 종이는 〈카피레프트 프로젝트 ‘인간, 같은’〉에서 (재)상연된 〈인간, 같은〉의 일부에 대한 몇 가지 “시험” 문제들을 담고 있다.다섯 개의 오지선다 문항은 작중의 몇 가지 모티프에 대한 이해도를 따지는데, 정답은 공개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자리에서 정답이 확정된다. 사전에 참여를 신청한 몇몇 관객은 “검토 위원”으로서 사무실에 입장해 배우 한 명과 함께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할 만한 것인지를 따진다. 이 대화는 사무실 바깥, 그러니까 전시와 공연이 진행된 그 공간에 생중계된다. 실은 문제지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그 대화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받아든 시험지의 문제들을 풀어보고 (제 친구인) 배우에게 정답을 알려 달라고 한 이가 있었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그래도 사무실 안에서는 “검토”가 행해졌다고 한다. 문제를 만드는 행위, 다섯 개의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고르는 행위, 혹은 몇 명이 모여 합의된 답을 도출하는 행위의 의미를 따져 물었는지 어쨌는지는 전해 듣지 못했다. 이 절차를 기획한 이들은 이런 반응들을 흥미로워 하는 듯했는데, 그래서 성에 차는지 어떤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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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더라, 며칠 전엔 저자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어디에선가는 저자가 여전히 살아 힘을 갖고, 또 어디에선가는 저자는 너무도 잊혀져 죽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9 하지만 역시,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저자가 죽었든 살았든 아무 상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대개 흘려 듣고 넘겨 버리므로. 산 사람의 말인지 죽은 사람의 말인지, 살아 있는 말인지 죽어 있는 말인지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므로.

  1. 이들 스스로는 “카피레프트 프로젝트 〈인간, 같은〉”이라고 칭하는 듯하다. 그렇게 쓰는 이렇다 할 이유를 들은 적은 없고, 여기서는 이 공연의 모티프가 된 〈인간, 같은〉(뒹굴 제작, 성지수 작·연출, 서울: 가로수길 쇼쇼, 2018.02.22-24.)과 구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렇게 적었다.
  2. 여기서 “까불다”는 “가볍고 조심성 없이 함부로 행동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까부르다”의 준말로서 “키를 위아래로 흔들어 곡식의 티나 검불 따위를 날려 버리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마도 앞의 뜻을 가진 “까불다”가 뒤의 뜻을 가진 “까불다”에서 비롯된 말인 것 같고, 곡식을 절구로 찧고 키로 까부르는 모습에서 유래한 “찧고 까불다”라는 말도 결국 “되지도 않는 소리로 이랬다저랬다 하며 몹시 경망스럽게 굴다”라는 뜻이다. 아무튼 그들은 종종 좀 까불며 논다.
  3. 〈인간, 같은〉의 소품은 아니다. “카피레프트 프로젝트 <인간,같은>의 2장 ‘예쁜 클론’의 관객 코멘트를 수집하기 위한 공연”인 〈우리는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다〉(서울: 요꼬스튜디오, 2018.12.01.)에 쓰인 것으로, 무대 소품이라기보다는 관객 소품 쯤 되는 물건들이다. 공연을 본 후 자기 생각을 말해 줄 것을 요청 받았던 관객들에게 제공했던 가면 같은 것들 말이다.
  4. 음악이라고 적어야 할까?
  5. 사실 나는 이 공연은 보지 못했다.
  6. 흔한 서식으로 A4 용지를 한 페이지 반 가량 채우는 분량의 글이며 필자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7. 그들이 ‘연극계’라는 곳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8. 공연장에서 받았다는 그 글에 따르면, 또한 “관객이 유일한 화자를 따라가며 불편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작품에 관객보다 사전 일조한 자로서 굉장한 권위를 갖고 간접적으로나마 주인 의식을 드러내는 부분” 때문이라는데, 이것이 도슨트가 작가를 천재적이라고 칭하는 대목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나로서는 잘 와닿지 않는다. 작가가 『싸이언스』라는 권위 있는 잡지에 실었다는 문장을 인용하는 등의 발화들과 함께 ― 실은 주되게는 내가 그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 때문에 ― 내게는 그저 능청스런 유머 정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봉사자’라는 지위에 있는 도슨트를 내세워 작품과 작가의 권위를 확인하는 미술관의 관습을 의식하는 내게 그런 장면들은 오히려 외부에 대한 풍자로도 읽힌다. 관람을 마친 관객들에게 한 마디 남겨줄 것을 청하며 뒹굴이 제공한 종이에 나는 “도슨트에게 임금을”이라고 적었다.
  9. 물론 그를 기리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그를 비판하는 이를테면 역사청산 같은 것의 필요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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