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스토리나 메시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라면 꽤나 ― 어쩌면 매우 ― 즐겁게 관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막이 좀 아쉽긴 했지만 연기, 무대, 음악 등 여러 면에서 빠지는 것 없는 공연이었다. 보통 30분 쯤 지나면 극장을 나가고 싶어지는 나이지만 두 시간 가까이는 별 고통 없이 공연에 집중했던 것 같다. 나머지 30분은 지지부진한 이야기가 조금 지겨웠지만.
좋았던 점들을 분석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다. 진행의 완급조절이나 유무형의 여러 장치의 사용 등이 훌륭했으니 괴롭지 않게 보았겠지, 하고 짐작할 뿐이다. 실은 그런 데엔 크게 관심이 없다. 다만 얼마 전 《엘렉트라》를 보게 했던,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극을 보고 싶다는 욕망은 잘 채워준 공연임은 부정할 수 없겠다.
궁금한 것은 이 시대에 왜 『리처드 3세』라는 희곡을, 짐작건대 큰 재해석조차 없이, 무대화했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연출은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작품”을 연출해 “당신은 리처드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하고 싶었던 적이 없습니까? 당신은 과연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행동을 저지르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라고 묻고 싶었던 모양이다.1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배우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고, 그들이 연기하는 인물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배우들이 객석을 침범하거나, 주인공의 독백이 마이크를 거쳐 객석에 울려 퍼지거나 하는 등의 연출이 그런 데에 일조했어야 할 것이다. 내가 그런 효과를 받지 못한 것은 3층에 앉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저 희곡이 그런 식의 초대를 하기에 적합했나 하는 점은 의문이다. 연출은 리처드 3세라는 인물을 매력적으로 느꼈고 그가 말로써 주변 인물들을, 그리고 관객들을 현혹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지만, 나로서는 아무런 매력도 설득력도 찾을 수 없었다.
오래된 희곡답게 인물은 평면적이면서도 쉽게 변화한다. 매혹 당해 점차로 이끌려 가는 과정 자체가 극에는 부재하고, 쉽게 전환되는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그런 여유를 남겨 주지도 않는다. 그나마 자기 야망을 좇는 것이 분명한 남성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이해 가능한 구석들이 있지만, 쉽사리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잊고 마는 여성 캐릭터의 변화는 도무지 따라 갈 수 없었다. 밋밋한 여성캐릭터들, ‘악역답게’ 장애를 가진2 주인공 ― 다행히도 이 극이 리처드 3세의 장애를 필요 이상으로 과장해 연출하지는 않지만 ― 과 같은 요소들은 2018년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우리 인간들 하나 하나의 깊은 내면과 마주하도록 하기 위해 저는 이렇게 철저하게 비도덕적인 작품을 선택한 것”이라는 그의 선택이 틀린 일은 아니었기를 바란다. 전시 《미러의 미러의 미러》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악을 보겠다는 자그마한 시도를 위해 이렇게 큰 일들이 필요한지 나는 의심스럽지만, 어떤 관객에게는 이 극이 자신의 내면을 재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이 희곡을 선택한 것은 그다지 지지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모자란 희곡을 두 시간 반이나 틈 없이 끌고 간 연출 토마스 오스터마이어를 비롯한 극단 샤우뷔네 베를린의 힘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좀 더 나은 희곡으로,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제 연극은 ‘이미지 연극’이 아니”라는 연출의 말이 어디까지 힘을 가질 수 있을지를 알고 싶다
-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리처드 3세》, 서울: LG아트센터, 2018.06.14-17.
내가 본 것과는 다른 회차인 공연에서 있었던 일.
https://mobile.twitter.com/strangeth1ng/status/1008289063944609792?fbclid=IwAR133XgJpzPArhpD_sadU7IedwufcNtNZqz5HchAPtdefV21dV2UoiQb4v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