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원래 없었던지, 이번 전시를 위해 뗀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두운 방 안으로. 모니터 하나, 프로젝션 화면 하나, 그리고 아래를 향한 붉은 조명 위에 붙은 검은색 조각 하나.1 전시 《미러의 미러의 미러》(이진실 기획, 서울: 합정지구, 2018.05.25.-06.24.)에 나는 이렇게 당도했다. 기획자는 “어쩌면 당신은 스팸에 가까운 이 이미지들, 원본성(진정성), 순수함, 정치적 올바름의 경계를 침해하는 이 놀이에서 유대감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나는 그 “당신”들 중의 하나다. 그것을 미리 안 채, 전시장에 당도했다.2
1.
거칠게 말하자면 질 낮은 이미지들로 구성된 전시다. 인터넷에 떠도는 온갖 잡스런 영상을 짜깁기한 〈Mondo Corea: Take Five〉(권용만)부터 90년대의 것쯤 되어 보이도록 만들어진 영상 〈메루메루빔〉(한솔)까지, 매끈한 이미지를 보는 쾌감을 주는 것은 없다. 그나마 이자혜의 그림들이 애쓴 티가 나는 쪽이랄까. 기획자의 말대로 “이 디지털 쓰레기더미가 순환하는 포스트-인터넷 환경에서 이제 대중은 당당한 이미지의 생산자가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다”면, 여기에 전시자로서 소환된 이들은 특출난 작가라기보다는 대중의 (무작위적) 대표에 가까울 것이다.
이미지를 접하는 것도, 그것을 가공하는 것도, 숫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도 모두가 쉬워진 이곳에서 작가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나는 그것이 고민, 혹은 통찰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내게 무의미했다. 저 너저분한 이미지들이, 자신들이 내던져진 어떤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그 세계를 반복해 비추는 거울인 한에서 말이다.3 적어도 그들과 같은 세대인 이들, 그러니까 이미지를 쉽게 접하고 가공하고 생산하는 이들에게 이 이미지들은 일상의 반복 이상이 아니다.
“제작자는 본 영상에 등장하는 그 어떤 영상이나 메시지도 동의나 추천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권용만의 〈Mondo Corea: Take Five〉를 굳이 보고 앉아 있을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동의나 추천이 아니면 무엇인지를, 영상은 물론 (부재하는) 문장조차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세상은 더러워, 그래서 이 영상도 더럽지, 같은 말이나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이미지의 잉여와 휘발 속에 깃든 진짜 삶의 재현적 실패[…]를 보란 듯이 비웃고 가지고 노는 인터넷 하위문화의 정서와 언어”는 다른 무언가로 번역되지 못한채 구경거리로 남는다. 그 문화 바깥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구경거리 말이다.4
2.
자신이 제작한 이미지들을 구멍을 통해 훔쳐보도록 전시한 이자혜의 〈Crispyring〉을 통해 나는, 나의 더러운 욕망을 재발견하면 되는 걸까? 누구에게나 있는 숨겨야 할 욕망을 드러내고 건드리는 작업, 에 나는 관심이 없다. 굳이 건드려 주지 않아도 누구나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그러하니 나도 괜찮아, 라는 위안을 하려 들 것이 아니라면, 그 다음을 말하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어디엔가 제 욕망을 전시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지만, 큰 흥미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꼬인 인간이라서, 아무나 ‘그 다음’을 말하는 것이 달갑지 않다. 권용만의 〈페미네이터: 재기의 날〉은 무려 53분이나 되는 길이의 패러디 더빙을 통해 최근 페미니즘의 어떤 모습들을 비꼰다(고 추측한다. 나는 그 영상을 보는 데에 53분이나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정제된 언어로 만들어 놓는다면 나 역시 동의할 법한 지점들이 있을 터이나, “빅자지쑈”의 주인공 중 한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5 모두가 무력하게 이미지들을 반사하기만 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면, 한정된 시간과 기력을 어디엔가 투여해야 한다면, 나는 좀 더 나은 이야기에 그리 하고 싶다.
3.
한솔의 〈메루메루빔〉 만을 유심히 보았다. 부러 낡아 보이게 연출한 배경 영상 앞에 색깔이 채워지는 가사들, 그러니까 노래방 영상을 전시한 한솔은 이 작업을 통해 (먼) 친구의 죽음을 “착취”한다.6 그러나 이 작업은 동시에 메루메루의 글들을 대신 읽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목소리 없이 녹음된 음원을 통해 한솔은 관객이 이 문장을 스스로 읽도록 유도한다. 더 이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 블로그와 트위터에 묵어 있는 문장들을, 그렇게 되살린다.
메루메루는 세상을 떠난 성노동자다. 누구는 성노동이 그를 한동안이나마 살게 했다고 여기고, 누구는 성노동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여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마음에 들어 했던 모양이지만, 그 일에 따라 붙는 많은 것들 ― 구매자들의 행동에서부터 구경꾼들에 행동에까지 ― 이 모두 달갑지야 않았을 테다. 다른 많은 삶이 그러하듯, 좋은지 싫은지 분간하기 어려워진 일상을, 그는 글로 남겼다. 한솔이 가져다 쓰는 것은 그 글들이다.
고인의 글이 다시 읽힐 일을 만든다는 점, 고인이 하고팠던 말을 조금이나마 더 전한다는 점을 제외하고서도 이것을 어떤 추모와 애도로 읽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가벼워 보여서가 아니다. 나는 죽음을 섧어하지 않으므로, 그런 상실을 애도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런 나로서는 알기 힘든 영역이다. 다만 그가 메루메루의 죽음을 웃으며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슬프지 않다는 뜻이거나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정도를 알 뿐이다.7
4.
동물원에 다녀 온 느낌이다. 못생긴 동물들만 있는 동물원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동물원이어서, 씁쓸한 마음이다. 전시에서 인용된 이미지들로 구성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이라면 굳이 보지 않아도 좋을 전시 같다. 그 세계 바깥에서 흥미를 가지는, 그러나 그 세계에 들어가기는 저어되는 사람이라면 들러봄직하다. 동물들이 보고 싶은, 그러나 벌판으로 나아가기는 곤란한 사람들이 동물원에 찾아가듯 말이다.
- 전시 안내문을 보면 이 외에도 무언가가 더 있었던 모양이다. ↩
- 이 글을 어떤 문장들로 시작할지 고민했다. 이런 시작은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메루메루, 그는 나의 트위터 계정을 구독하고 있(었)다. 나도 한때 그의 것을 구독했다.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트윗들은 보고 싶지 않아 구독을 해지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던 것 같다. 그의 부고가 전해졌다. “메루메루빔”이니 “육개장이 없다구요” 같은 알 수 없는 말들을 통해서였다.” ↩
- 전시 제목은 최근 페미니즘의 화두 중 하나인 ‘미러링’을 떠오르게 하지만 그와 큰 상관은 없어 보인다. 저 미러링이 반사상을 통해 원본의 문제를 폭로하는 것이라면, 이 전시가 보여주는 어떤 미러링은 반사상 속에서 자신들 ― 그러니까 거울들 ― 의 무능력함을 보여줄 뿐인 듯하다. ↩
-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 이상함을 즐기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 되어 보여주는 〈CHERRY BOMB〉(업체×류성실)도 내게는 비슷한 결로 읽힌다. “비현실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유튜버라는 인물과 서사를 통해 포스트-인터넷 세대의 감각 구조와 부유하는 주체들의 형상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는데, 글쎄, 굳이 이렇게 볼 이유가 있나 싶었다. ↩
- http://krrr.kr/wiki/index.php?title=빅자지쑈_논란 참조 ↩
- 내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작품 옆에 붙어 있던 작가의 말에서 가져 온 단어다. 이 글에서의 나머지 모든 인용은 전시 리플렛에 실린 기획자의 글에서 가져 온 것이다. ↩
- 메루메루의 블로그는 https://blog.naver.com/miss_0_97118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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