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절차들》(동시상영 기획, 서울: 오픈박스, 2018.03.27-04.21.)이라는 제목은 장례식을 떠오르게 한다. 삶의 마지막 절차로서의 장례식.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몸을 폐기하는 절차로서의 장례식. 《마지막 절차들》이 전시하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몸들이지만, 그것들이 ‘기능한다’는 증거는 없는 몸들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동작들을 반복하는 몸들, 건강하지 않아 보이는 몸들, 그리고 그런 몸들이 전시되는 가운데 흘러 나오는 알 수 없는 노래, 연옥을 피하는 방법에 대한 한 수녀의 말, 혹은 귀신을 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전시되는 것은 애슐리 로마노Ashley M. Romano와 데이빗 꾸티어레즈David Gutierrez의 작품 두 점이다. 30분 정도 되는 시간을 비슷한 길이의 영상 〈데스마스크Death Masks〉1와 〈장례식들Last Offices〉2이 채운다. 각각 15분 남짓의 긴 길이에도 불구하고, 두 편 다 이렇다 할 서사를 갖지는 않는다.
〈데스마스크〉의 주인공은 춤 추는 바디 백bady bag이다. 시체를 담는 부대 말이다. 함께 춤 추자는 노래가 흘러 나오고, 두 개의 주머니는 이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러나 종종 음악은 끊어지고, 부대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다 화면이 넘어가면 연옥을 피하는 법에 대한 전화 상담을 하는 수녀의 목소리가 나오는데, 이때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드랙의 문법으로 분장한 두 작가의 모습이다. 아마도 연옥을 피하지는 못할 사람들. 기획자들은 “젠더 퀴어인 데이빗과 비대한 몸집의 여성인 애슐리는 이성애가 규범이 된 환경 속에서 각각 결핍과 과잉을 상징하는 ‘극단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3 위반하는 몸들, 그들의 자리는 천국은 아닐 것이다. 지옥조차도 아닐는지 모른다. 춤 추는 바디 백, 그 정도가 어울린다.
〈장례식〉들의 기억은 좀 희미하다. 한국의 이야기가 나왔다. 아마도 오래 전의 것일 낡은 집, 부엌이 집 바깥에 있는 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막을 만든 이가 “한국의 집”을 “[내가 살았던] 한국의 집”으로 옮긴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 영상이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읽히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리라 생각했다. 이 영상에도 아마 두 작가의 것일 몸들이 이불에 가려진 채 등장하는데4 편안해 보이는 이불은 아니다. 손발이 삐져 나온 구멍이 있는 이불, 몸들은 천천히 그것을 이불 속으로 끌어 당기지만, 과연 그 속에서 편안함을 찾았을는지는 모를 일이다.
허락된 자리를 갖지 않은 두 위반적인 몸들이, 제 몸에 맞는 자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제 몸에 맞는 자세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기대어 선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한 명은 과잉, 한 명은 결핍 ― 둘을 더해 다시 나누면 온전한 둘, 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위반적인 몸들에게도 집은 필요하므로, 기댈 사람 한 명쯤은 허락되어도 좋을 것이다. 조금은 덜 외롭게, 위반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 미국의 아너 프레이저 갤러리에서 상영된 바 있으며, 전체 영상이 공개되어 있다. https://vimeo.com/128439910 ↩
- 작가의 홈페이지 http://www.ashleymromano.com/last-offices/에 일부가 공개되어 있다. 제목의 번역은 내가 한 것인데,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전시 영상에는 영어 제목만이 나왔던 것 같다. 전시 안내문은 보지 못했다. ↩
- https://www.facebook.com/dongshisy/posts/2042662349330629 그러나 데이빗이 젠더퀴어라는 것이 영상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영상 만을 갖고 말하자면, 그가 갖는 결핍은 ‘지나치게’, 그러니까 남성답지 못하게 마른 몸에서 드러난다. ↩
- 이불에 가려지지 않은 몸들 또한 등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