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 건너편 ‘매직 캐슬’에 사는 6살 꼬마 ‘무니’와 친구들의 디즈니월드 보다 신나는 무지개 어드벤처를 그린 작품”이라는 설명1은 묘하다. 디즈니월드가 얼마나 즐거운 곳인지는 영화에 나오지도 않을뿐더러(이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무니와 친구들은 소위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설명이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힘일 것이다.
묘한 것은 실은 제목부터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디즈니월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 도리 없는 관객은 이 영화 안에서 어떤 ‘기획’을 찾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아이들의 하루짜리 프로젝트조차도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으니 말이다. 여기서의 프로젝트를 어떤 삶의 기획으로 이해한다면, 적어도 플로리다에서의 이 몇몇 아이들의 삶이란, 아무런 기획 없는 기획, 어쩌면 자유, 그런 것이 될 것이다.
포스트 모던, 에 대해 생각하며 보았다.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이, 아이들이 뛰어 노는 의미 없는 장면들을 두 시간 내내 중계하면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포스트 모던의 한 줄기는 아닐까 생각하며 보았다. 영화는 거의 말 그대로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중계한다. 다큐멘터리조차 아닌, 그저 기록영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 영화는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놀고, 놀고, 또 노는 아이들을 좇을 뿐이다.
특별한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난 속에서도 밝게 자라는 아이들,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하면서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엄마, 툴툴거리지만 곁에서 이들을 지키는 모텔 매니저. 뻔한 암시들을 해대기 좋은, 뻔한 교훈들을 남기기 좋은 소재들이지만 이 영화는 그런 길을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일 것이다. 아이들이 아무런 의미를 생산하지 않으면서 그저 놀기만 할 수 있는 것은 말이다.
가난한 삶이란 이래야 한다는 묘사를 이 영화는 하지 않는다. 할렘가 대신 장기투숙 모텔을 배경으로 삼고 ― 모텔이므로 집은 깨끗하고 매니저의 관리 또한 받는다 ― 엄마들은 (아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나름대로의 케어를 제공한다. 어떤 가정에서 그 케어는 부족하기 그지 없지만,2 아이들은 상처 받지 않는다. 객관적인 기준, 혹은 상대적인 기준에서 볼 때 불행해야만 할 이 가족들은 각자의 행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영화 속에서 무니의 행복을 방해하는 유일한 요소는, 무니를 행복한 곳으로 보내려 드는 아동국 직원들이다. (영화는 그러나 아동국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하나의 이야기는 내적인 완결성을 갖춘 구조여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므로 영화는 아이들의 놀이를 목적 없이 좇는다.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보여주어야 할 상위의 무언가가 없으므로 영화는 아이들을 묘사하는 데에 특정한 문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따라야 할 문법이 없으므로 영화는 플로리다의 풍경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묘사하고 아이들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풍경을 묘사한다. 어쩌면 그 점이 한계일 것이다. 사람의 묘사와 풍경의 묘사는 달라야 한다고 믿는, 전자에는 어떤 윤리적 함의가 따라 붙어야 한다고 믿는 나 같은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한계겠지만.
사람과 풍경을 평등하게 묘사하기: 《플로리다 프로젝트》
안팎 / 2018.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