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워커스Hidden Workers》(서울: 코리아나 미술관 space c, 2018.04.05-05.16.)라는 제목은 중의적인 의미라고 한다. 소위 비가시화된 영역에서 일하는 숨은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을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이를 테면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의 숨은 작업자들. “주변에 항상 존재하지만 주요 관심의 대상은 되지 못했던 ‘여자들의 일’ 이야기를 조명”1하겠다는 의도로 기획된 전시다. “숨은 노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여자들의 일”을 조명하는 것은 그들의 노동이 숨겨져 있는 대표적인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도 변했지만, 여전히 가사와 육아, 그리고 돌봄 노동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자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관 건물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리셉션 데스크의 여성 노동자다. 전시장에 내려가면 몇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관객들을 맞이하고 안내한다. (그들이 전문적인 안내를 위해 고용된 이들인지, 평소에는 사무실에 앉아 다른 일들을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조금 있으면 차려질 케이터링 역시 여성 노동자들의 손으로 제공될 참이다. 이들은 보이는 노동자일까 숨은 노동자일까. 분명 ― 다른 숨은 노동자들이 종종 그러하듯 ― 공개된 곳에서, 타인들의 앞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의심스럽다. 이들의 노동이 노동으로 인식될는지, 이들 모두가 여성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신경 쓰일 일일는지 말이다.
전시장에서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불투명 아크릴로 제작된 부스들이다. 좌식으로 된 것이 두 개, 입식으로 된 것이 두 개, 네 개의 부스에는 모두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모니터에 등장하는 것은 다양한 국적의 “아이돌보미”들이다. 임윤경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2012-14)는 이 노동자들이 자신이 길렀던 아이들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모은 작업이다. 이주민이거나 하층민이므로, 이들은 표준적인 말씨를 쓰지 않는다. 조선족의 말씨, 혹은 히스패닉의 말씨로 그들은 편지를 띄운다. 아이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말들 뒤에, 이들의 노동이 숨어 있다.
그 옆으로는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의 60-70년대 퍼포먼스 작업 몇 점2의 기록과 릴리아나 앙굴로Liliana Angulo의 자화상 〈유토픽 네그로Utópico Negro〉(2001)가 걸려 있다. 거의 반 세기 전에 여성의 가사 노동을, 혹은 개장 시간 전에 이루어지므로 숨겨지는 청소노동자들의 일을 미술관 전시장 안으로 들인 기념비적인 퍼포먼스이지만, 벽에 걸려 있을 뿐 관객들의 진로를 가로막지 않으므로, 전자는 이제 아무 힘도 없어 보였다. 후자의 작업은 벽지와 같은 무늬의 옷으로 몸을 숨기고 얼굴만을, 흑인의 얼굴만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여자들의 일”이라는 구도에 인종의 문제를 끌어 들이는 작업이다. 이주노동자가 점차 늘어가며 (소도시의 공장 혹은 농장에 머물지 않고) 이제는 대도시의 식당과 같은 가시적인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지금의 한국에도, 이 작품은 할 말이 있을 것이다.3
전시장을 나와 한 층을 내려가려는 참에 보이는 것은 조혜정과 김숙현의 〈감정의 시대: 서비스노동의 관계미학〉(2014)이다. 간호사나 보욕교사 등 여성노동자들의 인터뷰 음성이 흐르는 가운데, 해당 직종의 한 순간을 포착해 고정 자세를 유지하는 퍼포머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무게를 유지하기 힘든 동작으로 변환시켜 가시화한다”는데, 다소간 장난스럽게 느껴진 것은 내가 꼬여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래층에 상영중인 폴린 부드리Pauline Boudrey와 레나트 로렌츠Renate Lorenz의 〈차밍 포 더 레볼루션CHARMING FOR THE REVOLUTION〉(2009)에서도 비슷한 장난기를 느낀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진지함을 깨 부수는 장난이라면 좋으련만.
1985년부터 2017년까지의 것들을 모은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의 작업들은, 미얼 래더맨 유켈레스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듯 싶다. 그들은 여성, 비백인 작가들의 작업에 주목하고 그것들이 배제되는 미국 제도권 미술계를 비판한다. 그 비판이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수용되는지 ― 물론 이 전시는 여성 노동을 다루는 여성 작가들을 소개하지만 ― 묻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교과서 속 사진에 지나지 않을 테다. 이 전시실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오히려 몇 개의 패널들이다. “재중동포 아주머니”의 간병 노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아라비아인과 낙타〉(심혜정, 2013)의 대사들을 여러 언어를 쓰는 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진행한 번역 워크숍의 결과물인 〈아라비아인과 번역사무소〉(2013), 네일숍 노동자로 일하며 만났던 단골들의 인상을 기록한 〈네일레이디〉(김정은, 2013) 말이다.4 이 여성 노동들이 단순히 여성 개인의 일이 아님을, 이 작업들은 묘한 방식으로 알려 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임윤경의 작업을 상영하는 모니터들에 붙은 어댑터들이다. 부스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겠지만 모두가 보이는 데에 설치되어 있었던,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었던 이 어댑터들은 뜨거웠다. 작업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겠지만, 종일 영상을 띄우느라 수고하고 있었다. 숨은 노동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5
- 이하에서 인용은 모두 전시 리플렛 ↩
- 〈메인터넌스 예술을 위한 선언문 1969!Manifesto for Maintenance Art 1969!〉 및 〈하트포트 워시: 닦기/자국/메인터넌스Hartport Wash: Washing/Tracks/Maintenance〉(1973). Maintenance를 번역하지 않은 것이 노동을 숨기는 일은 아닐까, 생각했다. ↩
- 그와는 별개로, 이 전시에 외국 작가들의 작업이 상당수 걸린 것이 어떤 효과를 낼지 궁금하다. 이러한 노동들을 외국의 일로, 한국의 관객과는 먼 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성별과 인종 혹은 국적이 교차하는 문제로, 전지구적인 문제로, 여성 노동의 이슈를 확장하는 효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예컨대,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에 광장을 가득 메우고 휴식과 사교를 즐기는 홍콩의 필리핀인 가사 노동자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여성, 열린 공간의 침입자들Female, Open Space Inveders〉(마리사 곤살레즈Marisa Gonzales, 2010-12)은 한국의 조선족 가사노동자들을 상기시킬 수 있을까? ↩
- 김정은은 전시 기간 중 매주 토요일 14-18시에 관객들을 상대로 손톱 정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
- 전시되었으나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작업으로 마야 자크Maya Zack의 〈마더 이코노미Mother Economy〉(2007),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의 〈지배와 일상Domination and the Everyday〉(1978), 임윤경의 〈지속되는 시간〉(2014)이 있다. 오프닝 퍼포먼스로는 임샛별의 무용 〈Hello?〉(2016)가 상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