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은 단조롭다. 이따금 사건 당일의 영상들이 재생되지만, 대개는 인터뷰 장면이다. 정수리가 잘릴 정도로 얼굴을 클로즈업한 푸티지들과 상반신 정도를 비추는 푸티지들. 그러나 《공동정범》은 카메라를 디밀며 무언가를 파헤치겠다고 달려드는 영화는 아니다. 클로즈업이 무색하리만치 인터뷰이들은 표정으로 말하지 않는다. 거르고 거른 말들을 조용히 읊조릴 뿐이다. 진실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어떤 개입을 시도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공동정범》은 기록에 충실한 편이다. 말하는 것은 영화, 혹은 감독들이 아니라 출연자들 자신이다.
A가 말하면 B가 잇고, B가 말하면 C가 잇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쉬운 방법이다. A와 B와 C 중 누구 하나가 잊은 것은 다른 사람이 채운다. 서로 맞지 않는 이야기는 삭제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곤 한다. 하지만 《공동정범》은 다섯 명이 다른 말을 하면 다섯 번 모두를 내보낸다. 서로 다른 말들이 병렬적으로 연결되면 남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저 중 어떤 것을 믿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영화의 장章을 나누는 제목들조차 이야기를 정리해 주지 않는다. 대화에서 언급된 중요한 단어들을 복기하는 정도다. 일시를 표시하는 글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글씨들로 띄워지는 이 제목들은,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대신 다만 잊지 말라고 관객들에게 요청할 뿐이다. 영화가 끝나면 함께 모여 퍼즐을 맞춰보자고 말할 기세로, 《공동정범》은 끝끝내 결론을 주지 않는다. 관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들은 모르는, 내가 찾아낸 진실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식의 욕망은 영에 가까운 듯 보인다. 그저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어쩌면 관객의 이야기까지도 듣겠다고, 《공동정범》은 말한다.
겨우 다섯 명이 번갈아 출연하는 것이 거의 전부지만, 《공동정범》은 반복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띄운다. 마치 이 이름을 잊지 말라는 듯이. 이명박이나 오세훈, 김석기가 아니라 이 이름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처음에는 “○○○ 철거민, 망루농성 연대 참가자”라고 뜨던 자막이 나중에는 “망루농성 연대 참가자”라고만 뜬다는 점 정도다. 감독들은 이런 식으로 작은 목소리만을 낸다. 용산 참사는 용산의 일이 아니라고, 연대한 모든 이들의 일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그러나 “연대 참가자”라는 말은 얼마나 텅 빈 말인가. 그들이 당일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줄 뿐, 그들이 어떤 결기로 참여해 어떤 싸움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 어떤 농성의 참가자들은 “전사”니 “용사”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텅 빈 말로써 감독들은, 인터뷰이들을 무언가로 만드는 대신, 역시나 평범한 ― 겁이 있고 욕심이 있는 ― 사람으로서의 그들을 비춘다.
그들을 영웅시하는 대신, 섣부르게 화해를 주선하는 대신, 그저 그들의 일상을 ― 무기력과 갈등으로 가득한 일상을 비춤으로써 《공동정범》은,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말하는 동시에, 진상규명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를 또한 묻는다. 이명박과 오세훈, 김석기를 처벌하기 위해? 그들을 끌어내리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런데 그것은 누구에게 더 나은 세상일까. 그것만으로, 이들이 자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애쓴다.
반복적으로 이름을 보여주는 자막들로, 아무런 정리도 해주지 않는 소제목들로, 엇갈리는 소회들로, 《공동정범》은 관객들에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하고 있는, 당신은 아직 하지 못한 생각, 을 요구한다는 말이 아니다. 잊지 말 것을 ― 용산참사라는 거대한 사건만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흔들린 작디 작은 삶들을 잊지 말 것을, 잊지 말고 생각할 것을, 《공동정범》은 요구한다.
《공동정범》, 섣부른 화해를 피하기
안팎 / 2018.02.08.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마치 스릴러처럼 느끼며 보았다고 하더라. 실제로 어떤 장면 전환이나 음향 삽입은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편집이었는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스릴러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본문에는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