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에서 저것으로 되어가는 상태로서의 몸의 외부적 변환-움직임, 그리고 끊임없이 감각과 감정의 변화들로 구성되는 내면적 움직임. 두 사람은 이러한 서로 다른 외/내부적 움직임을 전시공간 내에서 형태적으로 구성하려고 한다.1
작가 이현주, 그리고 콜렉티브 이말콤씨와 릴의 이인전 《움직임 사이의 형태》(서울: 아트스페이스 그로브, 2017.12.22.-2018.01.10.)는 어쩌면 평면의 스틸 이미지로 포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어떤 움직임들을 그려 보인다. 이현주는 (그 스스로는 “몸”이라고 표현하는, 그러나 “살과 뼈라는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신체라기보다는 시공간 내에서 의미와 상징을 통해 문맥화되는 어떤 것에 더 가[까운]”) 단편적인 형태들의 움직임을, 이말콤씨와 릴은 감정과 감각의 움직임을 그린다.
이현주는 크고 작은 도형들을 회전시켜 얻어낸 입방체들을 평면에 투사하거나, 혹은 아예 입체 오브제로 제작해 움직임의 흔적들을 추적한다. 〈절단에서 접합까지〉라는 제목이 붙은 연작은, 아마도 형태 자체를 실험하는 작업들일 테지만, 그 자체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그리고 공간 속에서 움직임으로써만 ― 확장하자면 행위함으로써만 존재하게 되는 어떤 몸들, 움직임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존재들을 지시한다.
이현주는 평면에 그린 도형에 움직임을 더해 그것을 3D로 렌더링한 후 아카이빙하(며 그것을 평면 혹은 입체로 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미지들은 ― 언제나 추가적인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으로서의 ― “재료”가 된다. 전시되기 위해 움직임을 요구하는 이 이미지들은 형태의 자율성, 예술의 자율성, 나아가 존재의 자율성에 대해 질문한다.
한편 각각 “감정의 탁본”, “감각의 탁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말콤씨와 릴의 〈바꿀 수 없는 건 내 목소리〉 연작은 감정의 움직임을 드로잉들로, 감각의 움직임을 오브제들로 표현한다. “탁본”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이것은 원본이 아닌 어떤 것, 작가의 말로는 “실체substantiality 아닌 비유metaphor”로서 존재한다. 역시 무언가의 자율성을 묻는 가운데, 이말콤씨와 릴의 작업은 또한 기록과 기억에 관해 질문한다.
전에 없이 많은 것이 기록되는 시대다. 누군가의 전화번호는 머릿속에 남는 대신 전화번호부에 기록되고, 어느 날의 소회는 마음속에 남는 대신 몇 장의 사진으로 박제된다. 이런 시대에 감정과 감각을 탁본하는 이말콤씨와 릴의 작업은 역설적이게도 기록-물질로서의 작품을 내어 놓음으로써 기록의 한계를 지적한다 ― 기록은 언제나 재해석되어야 하고, 기억이 없는 한 그것은 종종 불가능한 일이 된다. 요컨대 감정과 감각은 고정적인 기록 매체에 박제될 수 없는 어떤 움직임임을, 그것을 회상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새로운 움직임을 덧붙여야 함을 이 작업들은 말한다.
(그 자체 움직임을 갖는 영상이나 사운드가 아닌) 고정된 사물들을 통해 움직임을 전면화함으로써 이현주, 그리고 이말콤씨와 릴은 관람자들에게 움직일 것을 요구한다. 물론 이 요구는 단순히 몸을 움직일 것,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을 것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어떤 기억을, 어떤 존재를, 오브제로 물질화하는 대신 자신의 몸에 기입되는 감각으로 물질화할 것에 대한 요구다. 움직이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그러나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아닌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관람자 스스로가 움직일 것을, 이들은 요구한다.
- 이하에서 인용은 모두 전시 서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