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라는 유휴공간: <유휴공간 건축 프로젝트: 리-플레이>에 부쳐

수업 과제로 쓴 글. 내일 끝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 <유휴공간 건축 프로젝트: 리-플레이>에 대한 짧은 평.

 

 

미술관이라는 유휴공간: <유휴공간 건축 프로젝트: 리-플레이>에 부쳐

 

안내에 따라 전시장에 들어서는데 길이 막혀 있다. 나은중, 유소래의 야외 작업실과 커뮤니티를 위한 플랫폼 “움직이는 숲”이다. 바닥에는 “프레임을 자유롭게 움직여 공간을 구획하세요”라고 적혀 있다. 녹아내린 듯한 콘크리트 덩이들이 보이는 가운데 양쪽으로 몇 개의 구획된 공간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은 계단 몇 개 높이의 단이다. 바닥에는 사람들 머리꼭지 몇 개가 튀어 나와 있다. 시키는 대로 벽을 움직여 길을 트고 — 이번엔 옆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 콘크리트 덩이들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 역시 바닥에 적힌 문구가 시키는 대로 나는 신발을 벗었다 — 저마다 구멍 속에 숨겨둔 사람들의 몸이 보인다. 전면에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박천강, 조남일의 일시적 강연과 상영을 위한 플랫폼이다. 나도 적당한 굴을 골라 몸을 숨겼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머리만 내민 제 연인의 사진을 찍는다. 영상에 눈을 고정해 보려 해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시야에 어른거린다.

의도치 않게 내 머리꼭지도 여남은 장의 사진에 실렸을 시간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반대편 구석으로 가본다. 기둥 위에 얹힌 스크린에 학교며 병원이며 네모반듯한 공간들이 영사되고 있다. 도슨트는 리서치를 하던 작가가 읽게 된 책이라며 미셸 푸코라는 사람의 <감옥과 처벌>을 소개하는 중이다. 일그러진 거울로 된 기둥을 돌아 뒤로 가 보니 바닥에는 화살표, 화살표를 쫓아가니 검은 커튼 뒤로 두 개의 의자와 낮은 테이블 하나가 놓인 공간이 숨어 있다. 신형철의 ‘멘토링 스튜디오’를 위한 플랫폼이다. 그 뒤로 펼쳐져 있는 것은 안기현, 신민재의 ‘워크숍’을 위한 플랫폼이다. 종이심을 이용해 만든 의자며 테이블이며가 흩어져 있다. 어떤 테이블들 위에는 워크숍의 흔적이 남아 있다.

녹아내린 듯한 콘크리트 덩이들, 그러니까 정소현의 조각 <지평선>을 사이사이에 두고 사방으로 배치돼 있는 이 네 개의 플랫폼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용도에 맞는 이벤트들, 그러니까 강연과 상영, 멘토링과 워크숍들에는 <유휴공간 건축 프로젝트: 리-플레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기획 전시다. 전시설명에 따르면 “유휴공간을 지역 거점 문화공간으로 재생시키고자” 하는 이 프로젝트는 “관객이 문화활동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문화공간의 모습을 모색하고 작동가능성을 실험하는 무대”가 되려 한다. 박천강, 조남일의 플랫폼은 “서울 시내에 존재하는 특정 유휴공간”에, 신형철의 플랫폼은 “곧 폐교될 중학교의 일부”에 착안해 만들어졌다. 나머지 두 플랫폼은 어디든 평지가 있으면 설치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이다. 역시 전시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행해지는 17회의 이벤트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지향하는 관객참여의 장”이다.

 

가장 도시적인 공간, “유휴공간”

이 전시가 눈독을 들이는 유휴공간은 그 정의상 가장 도시적인 공간이다. 자본주의적인 공간이라 해도 좋겠다. 자연에는 유휴공간이 없다. 비어 보이는 땅에도 풀이 자라고 벌레가 자라고 들짐승이 자란다. 촌사람들은 땅을 놀리지 않는다. 논두렁 밭두렁까지도 비워두지 않고 돈 안되는 푸성귀나마 기르는 것이 그네들의 땅에 대한 마음이다. “유휴공간” — 그러니까, ‘쓰지 아니하고 놀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을 갖는 것은 대개 사업가의 일이다. 그것이 농부건 임대업자건 말이다. 개발의 채산성이 맞지 않는 곳만이 노는 땅이 된다. 유휴공간이 된다.

그러므로 유휴공간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의 도시, 지금의 자본에 맞서는 일이다. 그것이 지금보다 높은 채산성을 갖는 다음 단계의 도시와 자본을 향하는 일이건 혹은 차라리 자기 노동력에 대한 의무감에 가까운 촌사람의 태도를 향하는 일이건 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전자를 지향할 때엔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후자를 지향할 땐 도시텃밭이 일구어진다. 전자가 실패하면 슬럼가가 생기고 — 성공해도 슬럼가는 생기지만 — 후자가 실패하면 ‘경작 금지’ 팻말이 내걸린다. 요즘 같아선 전자도 후자도 성공하긴 힘들다. 그 덕에 유휴공간이 남는다.

흥미롭게도 네 개의 플랫폼은 모두 작가들의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지역이니 커뮤니티니 하는 말들이 이따금 등장하지만, 네 플랫폼은 모두 작가들의 멘토링 공간이거나 상영 공간, 워크숍 공간이거나 숫제 작업실이다. 마치 농부가 빈 땅이 보이면 일구듯, 작가로서 빈 공간이 보이면 작업을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또 한 번 흥미롭게도, ‘관리되지 않은’ 빈 땅에 (임시로) 설치할 수 있을 작업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수준에서건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개발은 전제해야 가능한 작업들인 것이다.

관리된 땅에나 설치할 수 있을 작업들이라고 해서 개발과 연결시키는 것은 섣부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어느 작업도 구체적인 공간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공간의 옆에 무엇이 있는지, 그 공간 주위를 누가 오가는지 이 작업들은 묻지 않는다. 어디든 옮겨다 두기만 하면 될 것처럼, 주변 공간과는 외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네 개의 플랫폼은 제시된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지향하는 관객참여의 장”은 시간표에 맞추어 운영된다. 시간을 맞추어 오지 않은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금세 바뀔 철판을 이리저리 옮겨 잠깐 길을 트거나 막는 것, 워크숍의 흔적이 남아 있는 테이블에 잠시 앉아 보는 것, 그런 정도가 전부다. 유휴공간은 플랫폼이 설치된 문화거점이 아니라 차라리 그 모습 그대로 유희공간이 되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박천강, 조남일의 플랫폼에 상영되는 영상인 박용석의 <Take Place>는 도시의 공터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사건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공터들에서 골프를 치거나 드리블을 하거나 관객 없는 신파극을 상연한다. 쓰지 아니하고 놀리는 땅은 그렇게, 사람을 놀리는 땅이 된다.

 

참여하지 않는 관객

이 플랫폼들이 결국은 개발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리고 적어도 이 전시 기간동안 이것이 제공하는 참여의 장이 잘 짜인 시간표에 구속되어 많은 경우 실질적일 수 없다면 이 작업들은 무엇일 수 있을까? 아니, 무엇으로서 이 전시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예정된 이벤트 없이 단순히 전시만 진행되는 시간 동안, <유휴공간 건축 프로젝트: 리-플레이>는 의외의 유휴공간을 산출한다. 저마다의 용도를 가진 플랫폼들이 용도를 발취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음으로써 발생하는 유휴공간 말이다. “관객이 문화활동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문화공간의 모습을 모색하고 작동가능성일 실험하는 무대”여야 할 그곳은 그 시간동안 일종의 폐허가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참여할 거리 없이, 그저 감상할 뿐이다.

하기에 “강연자와 청중의 관계를 보다 유연하고 수평적으로 만들어 자유로운 지식 교류를 촉발”해야 할 박천강, 조남일의 플랫폼은 그저 사람들이 몸을 숨기는 구덩이들이 되고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과 소통하는 공간”이어야 할 안기현, 신민재의 플랫폼은 그저 사람들이 쉬었다 가는 벤치가 된다. 관객들은 여기서 작품의 외형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다. 거리를 두고 감상해야 하는 작품들이 있어야 할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앉아서 쉴 수 있고 제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생겨나는 파열을, 그 파열 가운데 있는 자신을 감상하는 것이다.

이로써 이 공간들은 문화를, 문화생산자들과 문화향유자들을 만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만나는 공간이 된다. 구태의연하게도 정해진 시간이 정해진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이벤트”들 덕분에, 서울 시내에 자리 잡은, 결코 유휴공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거대한 미술관은, 하나의 유희공간이, 사람을 놀리는 공간이 된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물을 필요가 있다. 유휴공간을 무언가로 채워야 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그곳을 어떤 만남과 소통을 위한 자리로서 채워야 하는가, 혹은 사람들이 찾아가 혼자가 될 수 있는 빈 공간으로 남겨 두는 편이 더 필요한가. 전시를 보고 나와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내 옆 테이블에서 『면접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둘 사이의 대화인가, 신경 쓰이는 옆 테이블 따위 없는 홀로 될 수 있는 공간인가. 그것을 물을 필요가 있다.

대화와 소통의 플랫폼을 내세운 이 전시가 직접적으로 그 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는 그 답을 찾아 생각에 잠길 앉을 자리를 제공한다. 이벤트 시간을 피해, ‘참여하지 않는 관객’으로서 앉아 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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