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정보: https://www.tumblbug.com/nicenightmare
반복을 드로잉한다.*
일러스트라는 장르에 좋아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대상을 온전히 ― 이 또한 자의적인 기준이지만 ― 재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캐리커처만큼은 아니더라도 생략과 과장, 그리고 변형을 거치면서 대상은 독립적인 사물이 아니게 된다. 그린 이의 정신 속에나 존재하는 어떤 것이 된다. 곧,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대상을 이해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대상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여기에 반복이 더해진다. 대상을 반복적으로, 그러나 매번 다르게 그린다는 것. 이것은 대상을 이해하는 것인 동시에 대상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대상을 두려움 없이 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대상이란 어떤 사물일 수도, 어떤 사건일 수도 있다. 대상은 최초에는 언제나 충격을 동반한다. 낯선 것으로서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충격 없이 대상을 마주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충격적이라면, 아무것도 충격적이지 않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내게 아무런 영향도 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대상들 또한 처음에는 충격으로 존재한다. 그것을 그리는 동안, 나의 세계에 맞게 뒤트는 동안, 그 충격은 사라진다. 을씨년스러보이던 나무는 대관람차가 되고, 길을 막던 구조물은 어떤 얼굴이 된다. 대상은 나와 대화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런 식으로 세계와 화해한다.
이것은 그저 나의 틀을 대상에 씌우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대상이 내게 어떻게 보이는지, 대상을 보는 나를 나는 어떻게 보는지, 그런 것들에 관한 문제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다. 변형은, 대상을 제압하고자 하는 욕구에서가 아니라, 모든 대상은 모두에게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변형은 대상은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대상의 접점을 찾는 과정이다. 나무를 보는 나에서 대관람차를 보는 나로, 나 자신을 변형하는 과정이다.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이질적 파편들의 세계**
변형됨으로써, 사물들은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이질적 파편으로서, 파편난 세계에 산재하던 사물들은, 변형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이해 불가능해 보이던 사건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던 사건들은, 그렇게 내 세계의 한 요소가 된다. 나의 역사가 된다. 공중에서 떨어진 쇠파이프, 제 시간에 오지 않는 버스, 미세하지만, 한 사람의 삶을 ― 적어도 그의 하루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이 사건들은 그렇게 제 자리를 찾는다.
상상 속에서 순식간에 그러한 변형을 끝마치는, 매 순간 세계와 화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꾸준히 붓을 놀림으로써 겨우 세계와 화해하는, 겨우겨우 사건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붓끝에서 나오는 것이 문장이든 그림이든 간에 말이다. 여러번 보아야 한다. 여러번 쓰고 그려야 한다. 나무가 대관람차가 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뿌리 뽑힌 나무는 표지판이 되고, 벽에 난 창문은 액자가 된다.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작가는 반복해서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다.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과정 그 자체가 변형의 과정이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드로잉을 통해 / 판단을 유예한다 / 반복에 끼어드는 변화와 사건을 감지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보이는 그대로 보일 뿐인, 파편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지금의 비관을 반복하여 무감하게”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무감함은, 무심함과는 다르다. 세계에 기울일 수 있는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이는 것, 나의 틀, 나의 감정이 세계와 나 사이의 벽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세계를 관찰한다는 것, 세계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도태된 땅에 계란꽃이 자란다***
지금 작가를 둘러싼 대상들은 “개발 지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들이 가득한 곳이다. 그조차도 없는 공터가 곳곳에 있는 곳이다. 아직 사람의 세계가 되지 않은 곳, 그러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순간 심호흡을 해야 하는, 그러나 들숨에 섞여 들어오는 것은 묘한 낯섦 뿐인, 그런 곳이다.
아무것도 없지만 사건들로 가득한 공간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이 변화 중인,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아직 아무런 인간적 의미도 갖지 않은 공간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화 중이므로, 이대로 정을 붙일 수는 없는 공간들. 심지어 그런 곳에서, 친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매순간 세계와 적대하는 일이리라. 그런 땅에, 계란꽃이 자란다.
내 기억을 말해도 좋다면, 계란꽃은 유일한 친구다. 내가 가장 외로울 때 내 곁에 다가오는, 어디에서고 살아갈 수 있음을 텅 빈 말이 아니라 제 삶으로써 알려주는 그런 친구다. 세계와 화해하지 못한 채 조금씩 밀려나도, 변두리에 버려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중심에 온 것이라고, 텅 빈 말이 아니라 제 삶으로써 알려주는 그런 친구다.
세계가 낯설 때, 세계를 보기 두려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친구에게 기대는 것이다. 친구를 통해 세계를, 친구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친구의 어깨 뒤에 숨어서 세계를 보는 것,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는 것, 포기 않고 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반복 속에서, 천천히, 변형이 시작된다.
* 봄로야의 문장이다.
** 전시에 참여한 책방 만일이 고른, 아비타 로넬이 쓰고 강우성이 옮긴 문장이다.
*** 봄로야의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