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매니저가 말한다. 극에 등장하는 흡연 장면과 욕설은 사실적인 묘사를 위한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양해해야 하는 걸까? ‘사실적인 묘사’라는 것을 하는 이유가 분명치 않은 경우에 관객으로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완화된 묘사를 요구해도 좋은가? 혹은 소위 ‘사실적인 묘사’라는 것이 포르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해도 좋은가?
올해 초에 본 〈말 잘 듣는 사람들〉의 김수정 연출과 극단 신세계의 레퍼토리 연극 〈파란 나라〉를 보고 왔다. ‘파란 나라’란 극중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서 시작되는 사회 운동의 이름이다. 새마을 운동의 새마을쯤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강력한 공동체를 만드는 게임을 해 보자는 교사의 제안에 따라 공동체의 리더, 구호, 제복, 이름, 비밀 경찰 등이 정해진다. 학생들은 점차로 이 게임에 몰입하게 되고, 이윽고 그 영향력은 교실 바깥에까지 퍼진다. 파란이라는 공동체의 리더가 된 교사는 숫제 교주 같은 위치에 앉는다.
사유 실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전체주의에 물들 수 있는지를, 현실에 산재하는 문제들에서 얼마나 쉽게 도망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사유 실험 말이다. 그러나 실험이라는 말은 조금 아깝다. 실험이라기보다는, 예정된 결말을 보여주기 위한 억지스러운 도식에 가깝다. 진지할 것 없었던 공동체의 창립에서부터 점차적인 몰입, 이 공동체의 확장, 이윽고 파국까지를 보여주기 위해 연극은 많은 시간을 들인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건들과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어떻게 이러한 몰입이 가능해지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장면은, 그러니까 이 실험의 핵심은, 생략되고 만다.
〈파란 나라〉는 이야기를 통해 그 설득력을 갖추는 대신, 연출을 통해 그 끔찍함을 경험시키는 데에 초점을 둔 것 같다. 객석에까지 포진해 있는 수많은 배우들이 무대로 몰려 나와 빽빽이 서서 부르는 노래, 그들이 객석을 둘러싸고 나직이 외치는 섬찟한 구호, 이런 것들이 관객들의 감각을 자극한다. 그래, 모두가 같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모두가 같아지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지 못한 채, 관객들은 생생하게 느낀다.
그런데 이 전체주의적 공동체의 바깥에는, 그러니까 게임 이전의 교실에는 무엇이 있었더라. 우습게도 그곳에도 좋은 것은 없었다. 완력과 지능과 재력이 누군가의 지위를 결정해 버리는 사회,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누구도 누군가와 친구가 되지 못하는 사회, 그런 것이 있었을 뿐이다. ‘파란 나라’에 설득되지 못한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는, 오히려 저 전체주의적 공동체는 나쁘지 않은 대안으로 보일 정도다.
“〈파란 나라〉는 2017년 한국 사회의 평범한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집단주의, 타자에 대한 혐오, 폭력문제를 되짚어보게 하는 작품”이라는 공연 설명은 그래서 다소 의아하다. “타자에 대한 혐오, 폭력문제”를 사유할 것을 이 연극은 딱히 촉구하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예의 “사실적인 묘사”라는 것은 결국 포르노로 ― 대개가 성인인 관객들이 고등학교 교실을 관음하는 ― 남고 만다.
“쉽게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대중선동이 가능한 한국 청소년들의 브레이크 없는 미래에 대한 잔혹한 경고”라는 김창화의 한줄 평은 아마도 이 연극이 실패한 지점을 비추는 거울일 것이다. (리플렛에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연극 스스로는 그것을 모르는 것 같지만 말이다.) 30년 전 미국의 한 교실에서 이러한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 〈파란 나라〉의 배경이 고등학교 교실이 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는 없다. 어떤 관객은 착각하고 말 것이다. 저것이 “한국 청소년들의” 문제라고 말이다. 자신과는 무관한 문제라고 말이다.
〈파란 나라〉의 설득력에 관하여
안팎 / 2017.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