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애인(2007~)의 공연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그들의 마지막 공연이다.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_선택》(서울: 극단 애인 연습실, 2023.03.22-27.)은 해산 ― 그들의 말로는 “폐업” ― 을 앞둔, 그러기로 확정한 것은 아니라 해도 지금으로서는 다른 길이 없는 듯한 극단 애인의 상황을 그대로 무대에 올린다. 이제는 50대의 속도로 삶을 꾸려야 하게 되었고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은 일을 계속할 수 없는 김지수는 창단 후 15년을 내리 맡아 온 ― 자신의 말로는 “장기 집권”을 해 온 ― 대표직에서 물러나려 한다. 비교적 최근인 서너 해 전에 합류해 극단의 사무를 맡고 있는 조주희는 김지수가 없다면 애인은 문을 닫는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만큼 애정과 시간을 쏟을 사람도, 그만큼 후원회원을 모아 올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직접 대표를 맡겠느냐 애인을 폐업하겠느냐, 애인에서만 활동하겠느냐 다른 활동만 하겠느냐 ― 그가 던지는 질문에 전자를 택하는 단원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단호하게 후자를 택하거나, 애인과 외부 활동을 병행하겠다는 (본인으로서는 힘주어 말하지만 듣기에는 미적지근하기만 한) 답을 하거나다.
변한 것은 김지수만은 아니다. 공연의 시작은 강희철이 등장하는 영상이다. 그는 자리에 누운 채로 장애인활동지원을 심사하는 현장 조사원(김지수 분)의 질문에 답한다. 마찬가지로 신체적 변화를 겪으며 (노화 탓인지 질병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는 나오지 않았다.) 움직임이 전보다 어려워져 활동지원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다. 활동지원의 필요성을 몇 가지 수치로 환원하는 질문지의 구성에 의문을 표하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일단은 최대한 심사 결과에 유리할 만하게 답한다. 그렇게 얻은 활동지원 시간의 얼마간은 애인 활동에 쓰일 것이다. 개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극단을 유지하는 데에도 필요한 절차다. 누군가는 이렇게 몸이 변해 활동 시간이나 양상에 변화가 필요하지만 또 누군가는 상황이나 욕심이 변하기도 했다. 예컨대 애인 밖에서도 여러 공연에 출연하고 있고 그 폭을 넓히고 싶은 하지성은 내가 대표, 애인 폐업이라는 질문에 지체 없이 폐업을 택한다.
공연은 이제는 단원들 각각의 방향으로 틀거나 흩어지려 하는, 크게 티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껏 실은 여러 방향을 향해 여러 속도로 흘러왔을 극단의 역사를 훑는다. 김지수는 관객들 몇을 지목해 어떻게 이 공연을 보러 오게 되었는지, 이전에는 애인의 어떤 공연을 보았는지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지난 스물아홉 편의 공연을 모두 본 관객도, 친구가 출연한다고 해서 보러 꽃다발을 들고 온 관객도, 이전에는 제작진으로 참여했고 오늘은 관객으로 찾아온 사람도 있다. 단원들도 제각기의 이유로 ― 자신이 전과는 다른 어떤 역할을 맡았던 공연이어서, 처음으로 만석을 경험한 공연이어서 등등 ― 다른 공연을 다르게 추억한다. 외부와의 문제, 이를 테면 자신은 여러 해 동안 공연을 하며 무언가를 쌓고 즐기고 있지만 매번 ‘왜 장애인 연극을 해요’ 같은 질문만을 받게 되는 꼬임 같은 것도 있다.
공연에는 여러 의미로 지난 십수 년의 시간이 욱여넣어져 있다. 창단 때부터 함께 한 배우와 관객, 그보다는 몇 년 혹은 십 년쯤 뒤에 합류한 이들, 나처럼 오늘에야 비로소 그들을 만난 이들이 한데 섞인다. 벽에는 곳곳에 지난 공연들의 포스터와 후원회원들의 이름이 붙어 있고 배우들은 종종 그것을 보거나 가리킨다. 강예슬은 지인의 소개로 우연찮게 애인에 입단하게 된 과정을 되짚는다. 강보람과 하지성은 마치 처음인 듯 서로의 연기론을 묻고 배운다. 단원 몇몇이 최근에 각자의 버전으로 작성한 장애 연극을 만들기 위한 창작환경 규약을 관객들과 함께 읽는다. 백우람은 자기 방을 가져 본 적 없는 긴 시간을 곱씹다가 비로소 만난 자기 공간으로서의 애인(과 그 사무실)을 이야기한다.
많은 일들이, 해산을 앞둔 이 상황을 모른 체 한 채, 마치 첫만남처럼 이루어진다. 해산마저도 지난 세월을 함께 해 온 여러 관객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올리는 오랜 친구들에 대한 헌정 공연인 듯도 하고 장애 연극은커녕 장애조차도 낯선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려는 공연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단원들끼리 더 이야기를 나누어 어떻게든 붙잡아보려는 대화인 듯도 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서로를 더 잘 대해보자고 다짐하며 늦게나마 서로를 알아두려는 대화인 듯도 하다. 달라진 상황을 마주하며 어떻게 해야 잘 유지하거나 해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동시에 변함없이 (장애) 연극이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극단과는 별개이면서 극단이나 장애 연극의 조건이기도 한 장애인의 생활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복잡하게 흐르거나 멈추는 시간 앞에서 애인의 해산은 너무도 큰 문제였다가 어쩌면 사소한 문제였다가를 반복한다.
끝이자 시작인 어떤 시간이 펼쳐진대도, 그것은 다음이 있으리라는 희망이나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담담함이라기보다는 ― 모든 것이 계속해서 달라지기에 ― 매순간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당혹감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연기론을 둘러싼 토론은 물론 해산에 관한 논의조차도 처음이 아니다. 지난 번엔 어떻게든 이어가 보려고 했던 이가 그 마음을 그대로 먹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는 그도 폐업으로 맘이 기운다. 쌓아 온 역사와 함께라고 해도 녹록지 않다. 장애인 연극이 연기로써, 이를테면 기교나 아름다움이나 하는 것들로써 평가 받지 못하는 것이 답답해 하는 이도 스스로 이야기할 땐 운동으로서의 가치를 먼저 말하게 된다. 애인이 무엇을 해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또 한 번 이렇게 시간을 꼬고 겹치고 얽어야 할 것이다.
중반쯤이었을까, 무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앉아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던 강보람과 하지성은 무대를 가로지르며 시연을 시작하더니 이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시장통 간판들이 번쩍거리고 차며 사람이며가 다니는 거리에서 신나겐지 위태로인지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은 공연장 안에 있는 어떤 관객들에게는 아예 보이지조차 않는다. 에어컨 뒤 통유리창으로 이따금 보이다말다 하는 그들의 손끝이나 발끝만을 보며 기다렸다. 나갈 때는 둘이었는데 들어올 때는 셋이었다. 영상으로만 모습을 비추고 내내 공연장에는 없던 강희철이 비로소 들어온다. 벽에 붙어 있던 몇 년 전 공연 포스터 속의 사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그는 어떤 새로운 필요를 커버하기 위해 어떤 활동지원사들과 어떤 식으로 협조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관객에게 물을 청한다. 그가 늦게나마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이 현장조사원의 질문에 잘 대답한 덕일지, 강보람과 하지성의 춤 덕일지.
공연의 끝은 운동이었다. 김지수는 강희철에게 고무 끈을 건네며 같이 운동을 하자고 말한다. 이번에도 역시 처음인 것처럼, 평소에 어떤 신체 부위를 어떻게 쓰며 생활하는지 그래서 어떤 운동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정말로 처음이라서, 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극단과 연극이 그들에게 그랬겠듯, 운동은 약하고 변하는 이 몸들에게 필요한 것이자 이 몸들에게 종종 무리인 것이리라. 강예슬이 끈을 더 들고 나와 여러 가닥을 엮는다. 단원들이 둥글게 모여 박자를 맞추고 세기를 조절해 가며 한가닥씩 끝을 잡고 당긴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더라. 김지수는 마지막으로, 모두의 안전을 위해 함께 놓을까요, 하고 물은 뒤 셋을 센다. 모두 놓아 버리는 것이 왜 안전을 위한 것일까 궁금했는데, 누구는 붙잡고 있는데 누구는 놓아 버리지 않는 것, 놓을 때 놓더라도 서로의 속도를 맞추고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것이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같이 본 B가 나중에 알려 주었다. 셋을 세어도 동시에 놓기는 쉽지 않을 텐데 생각하며 보았다. 한 명이 조금 늦게 놓았고 고무줄 덩이가 그를 향해 날아갔다. 거칠게 날아가 그를 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게로 조금 가다 곧 바닥에 내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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