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 누가 읽어도 좋은 작품, 이라는 식의 고전 개념은 해롭다. 어느 분류에 속하는 예술이든 그렇겠지만 적당한 규모의 서사를 가진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소하리만치 구체적인 설정만을 가진 경우, 혹은 어디에 갖다 붙여도 좋을 만큼 추상적인 경우라면 조금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곳, 다양한 시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작품’이야 물론 있겠지만, 저런 식의 흔한 고전 개념은 어떤 작품이든 나름의 배경과 맥락을 갖고 있으며 어떤 독자든 또한 나름의 배경과 맥락을 갖고서 그것을 읽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들곤 한다.
현대인이 되어서야 해롭게 여기게 된 어떤 일들을 당연하게 해 내는 장면들을 비판 없이 ― 종종 아름답게 ― 묘사한 작품들을 저런 식의 고전으로서 읽는 일이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 외에 무슨 일을 할까. 전통에 답이 있다는 식의, 혹은 미래 ― 정확히 말하자면 ‘선진국’ ― 에 답이 있다는 식의 게으른 태도와 결합하면 그 해악은 한없이 커진다. 그러니 나로서는, 고전이라 불리는 것은 대개 사료로서나 의미를 갖는다, 고 말할 수밖에 없다.1
실은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다. 저런 식의 고전 개념은 종종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어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과는 다른 배경과 맥락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는 점이 지금 말하려는 바에 가깝다. (이것은 물론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잣대로만 비판할 수 없다는 주장2을 지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것이 아닌 토대를 가진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수용자가 준비해야 하는 것, 지금 마주한 수용자의 것이 아닌 토대를 가진 작품을 내어 보이기 위해 작가나 기획자가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곤 한다는 점 말이다.
어디서 누가 던져 준 고전을 읽고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홍보 문구에 “고전”이라는 말이 들어가지도 않은 ― 다른 무엇 때문이라기 보다도, 동시대의 작품이기 때문이었으리라 ― 어느 공연을 보고 와서는 혼자 의심을 하고 있을 뿐이다. 홍보물에는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다. 실황 카메라나 라이브 음악을 언급한 형식적 요소에 대한 소개 약간, 그리고 “슬픔과 권력 사이의 관계를 블랙코미디와 정치 풍자극 형식을 빌어 무대 위에 펼쳐낸 작품”이라는 선의 카피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3
뭐, 게을렀던 내 탓이다. 벨기에 출신의 연출가가, 독일어 이름을 가진 극단에서, 덴마크를 배경으로, 유럽 우익화를 제재로,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블랙코미디 풍자극을 만들었다는 사실 쯤을 알았다면 좀 더 찾아봤어야 했겠지. 아니면 알았어야 했을 것이다, 이 극을 아무런 준비 없이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게으른 자이므로, 남을 탓하기로 한다.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채 이 공연을 한국의 무대에 올리기로 한 프로그래머와 그 제안을 덥썩 받아 문 저 극단을.
고전이라 불린 적 없는 작품이지만 저 고전 개념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무언가가 준비 없이 이해될 수 있다는 착각이 말이다. 이 공연을 섭외한 프로그래머가 과연 무엇을 이해했을지까지도 의심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참기로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극의 배경이 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극의 흐름을, 그 속을 오가는 감정들을 적어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도, 프로그래머도, 극단도, 그것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우익화니 국수주의, 인종주의니 하는 것들은 대강은 알고 있다. 저들이 어떤 일상을 살고 있기에 그 흐름 속에서 저런 행동을 취하는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해도 말이다. 좀 더 큰 문제는 코미디라는 요소였는데, (사실 나로서야 통상적인 한국인, 정확히 말하자면 문화 생산자들이 통상적이라고 상정하는 어떤 한국인 상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한국의 코미디로부터도 대개 웃음보다는 분노와 짜증을 얻지만) 어디가 왜 웃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들의 일상적인 연기 톤을 알지 못하므로 저 행동이 슬랩스틱을 노린 것인지 아닌지부터를 알 수 없었다. 주요 인물 중 하나는 가정과 지역에서 ― 대개는 어쩌면 사소한 ― 전횡을 일삼는 가부장이자 관료였는데, 벨기에, 독일, 프랑스, 덴마크의 문화에 조금씩 기대고 있을 저 극이 보여주는 그의 행동이 공포를 위해 묘사된 것인지 우스움을 위해 묘사된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4
자신들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떠했을지 알지 못하므로 극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나로서는 어렵다. 다만 프로그래머의 게으름과 극단의 겁 없음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애초에 국제 무대를 노린 것이었을까?) 언제 어디서 누가 읽어도 좋은 작품, 이라는 식의 고전 개념이 한국에서 통용될 때, 거기에 포함되는 것은 구미의 것, 동북아시아의 것 정도가 거의 전부임을 또한 기억해야 할 테다.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얻지 못하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의 것들, 아프리카의 것들, 중남미의 것들, 그런 식으로 묶이지조차 않는 어느 지역의 것들이 있음을 또한 기억해야 할 테다.
그냥 나의 게으름을 탓하기로 하자. 톨스토이니 도스토예프스키니를 읽으며, 최초의 진입장벽 ― 그들의 문화에 속하는, 사람을 호명하는 한국과는 다른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 ― 을 넘기조차 귀찮아 했던 나를.
- 사료로서의 고전 ↩
- 우습게도 이런 주장은 실은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잣대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랍시고 등장하곤 한다. ↩
- 극장 예매 시스템에 등록된 정보는 여기까지이고, 이 공연을 기획한 축제의 소개 사이트에는 간단한 시놉시스가 또한 올라와 있다. ↩
- 그는 건장하므로 위협적이지만 비합리적이다. 저런 비합리적인 분노, 를 비웃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비합리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은 웃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관객은 생각하며 관극하므로, 위협적이어서는 안 될 저 위협이,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묘사되었는지를 고민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