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의 청소년 무용극 〈사심 없는 땐쓰〉(2012)를 보았던 때를 희미하게 기억한다. 청소년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춤을 추고, 마이크를 잡고 이런 저런 말들을 외쳤다. 나이브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나 뻔히 접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절규 같은 것들. 청소년의 생명력이랄까 활기랄까를 춤으로 전달한다는 점만이 새롭다면 새로웠다. 여러 면에서 그 공연을 떠오르게 했다. 저들의 에너지를 춤으로 전달하려 들었다는 점에서도, 나이브하다는 점에서도.
〈죽고 싶지 않아〉(류장현 연출, 서울: 백성희장민호극장, 2018.06.15.-07.01.)는 열한 명의 무용수가 무대에 오르는 무용극이다. 약간의 대사나 장면장면의 스토리적 모티프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 무대를 채우는 것은 춤동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다. 수적으로 많은, 화려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몸은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청소년으로 분한) 그들이 에너지 넘치는 존재들이라는 것, 그 이상을 그 몸짓들은 말해 주지 않는다.
대화를 통해서, 군무를 통해서, 혹은 벽이며 바닥이며에 적힌 문장들을 통해서 이런저런 소재들이 언급되거나 시사된다. 청소년들의 사랑(정확히는 성애), 왕따, 빠듯한 하루 일과 같은 것들 말이다.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재현들 속에서 이들에게는 그 어떤 입체감도 부여되지 않는다. 성적으로 왕성한,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이유 없이 누군가를 따돌리는, 그저 힘이 넘치는, 그런 평면적인 존재들로 재현될 뿐이다. (막간극 쯤 되는 장면에 크로스드레싱을 한 배우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남자 무용수들은 바지를, 여자 무용수들은 치마를 입고 서로 다른 ― 성별에 따라 배분된 ― 몸짓을 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는 것은 성적 감수성 또한 없음을 드러낸다.
그들의 삶이 어떤 조건 속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성찰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차례차례 한 명씩을 따돌리던 길고 긴 군무의 끝에, 마지막으로 따돌려진 한 사람이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의 노래 “I’ll Survive”에1 맞춰 춤추는 장면에서 이는 극적으로 드러난다. 왕따 문제는 당사자가 용기를 내고 맘을 다잡는 것으로 일단의 해결 ― 그를 따돌렸던 이들 중 하나가 바닥에 앉아 그의 춤을 바라본다 ― 을 맞는다.2
아무런 성찰도 새로운 발견도 없이 만들어진 극은 전적으로 감각에 의존한다. 관객 대기 시간부터 울리는 분필로 칠판에 무언가 쓰는 소리, 혹은 벽을 타고 문을 넘나드는 배우들의 아크로바틱한 움직임, 크게 울리는 음악들. 그러나 아무것도 지시하거나 표현하지 못한 채, 순간의 자극만이 되어 사라질 뿐이다. 한 친구의 평을 빌자면, 그 많은 무용수들이 그렇게 열심히 움직이는데도, 오히려 벽면의 문장들에 더 관심이 간다. 무용수들의 에너지조차, 청소년들의 에너지라는 데에 가 닿지 못하고, 그저 무용수들의 에너지로 멈춘다.
유일하게 인상적인 장면은, 무용수들이 하나하나 쓰러지고 ― 죽고 ― 한 명의 무용수가 무대를 돌며 그들의 위치를 분필로 표시하는 장면이다.3 분필로 몸의 윤곽을 다 그리면 그 자리의 주인은 일어서서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어쩌면 그저 죽음을 확인하고, 죽은 자가 세상을 떠나는 장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관극 직전에 김원영의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 2018)을 읽다 들어간 탓인지, 죽은 이들이 한 명 한 명 개인으로 호명될 때, 되살아나는 장면으로 보였다.4 하지만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어떠한 단서도 극은 제공하지 않으므로, 나는 이것이 개인적이고 과도한 해석이라고 여긴다.
요컨대 〈죽고 싶지 않아〉는, 청소년을 호르몬과 혈기에 지배당하는 존재쯤으로 이해하고 넘치는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죽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음을 희미하게만 인지한 채, 훈련된 몸들의 강렬한 에너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극으로 만들어졌다. 좁게는 학교라는 체제, 넓게는 청소년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고 통제하는 사회 체제 전반,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와 분석 없이, 청소년을 평면적으로 만드는, 당연한 귀결이었을 테다.
- 극중에 사용된 것이 누구의 버전인지는 모르겠지만. ↩
- 숨 찬 배우의 말을 온전히 듣지는 못했지만, 뇌의 미성숙을 언급하며 청소년들의 격정을 정당화하는 한 장면에서도 나는 같은 것을 느낀다.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회의 관념을 반복하며 이 극은, 문제를 개인에게로 돌린다. ↩
- 2016년 상연에 대한 한 리뷰에 따르면 “1999년에 미국 컬럼바인 총기사건을 모티브로” 한 장면인 모양이다. 이 리뷰의 필자는 “‘스스로 죽은 척’하는 아이들의 장면은 ‘무엇이 아이들의 손발을 묶고 죽음을 택하게 만들었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고 평하지만, 나로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http://tong.joins.com/archives/25290 ↩
- 이 책에서 김원영은 일본의 한 장애인 시설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언급한다. 일본 언론은 피해자 신원 보호를 이유로 희생자들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 김원영은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보도 과정에서 이들의 개별성이 삭제된 것으로 말하는 인터뷰를 인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