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건 그저 가볍게 보아서였을까, 나는 연상호 감독이랑은 좀 안 맞는 모양이다. 《돼지의 왕》이 그랬고 《염력》이 그랬다. 전자는 기억이 희미해져 왜 그랬는지 잘 생각 나지도 않지만. 《염력》은 강제 철거 문제를, 아니, 용산 참사 문제를 다룬 영화다. 그저 레퍼런스로 삼았다거나 염두에 두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직접적인 참조를 하고 있다. 화염병에 옮겨 붙은 불이 그렇고 남평상가의 남 자가 그러하며 크레인과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해 강제 진압을 시도한 경찰의 모습이 그렇다. 좀 더 잘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염력》을 보며 이런 식의 지시는 부주의하고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코믹극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블랙 코미디라기엔 가볍다.) 아무튼 나는 연상호 감독이랑은 좀 안 맞는 모양이다.
우연히 염력을 얻게 된 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용역 철거반이나 경찰과 맞붙게 하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를 숨긴다. 물리력이 더 있었더라면 상가를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그릴 뿐이다. 악역 홍 상무(정유미 분)의 연기가 아니었더라면 (단순히 그의 대사나 행동이 아니라 연기가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느낀다) 싸울 수 없는 적, 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영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염력을 얻는 것은 운석이 품은 어떤 에너지를 통해서다. 지구에는 없는 힘이 아니면 맞설 생각조차 못 해볼 적, 을 표현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아무런 힘 없이도 대적하려 들었던, 자신의 터전을 지키려 들었던 철거민의 결기를 가벼이 보이게 만들 뿐이었다.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역시나, 주인공들의 관계다. 염력을 갖게 된 신석헌(류승룡 분)이 한 몸 바쳐 돕는 것은 (어릴 적 버리고 떠났떤) 딸 신루미(심은경 분)가 속한 상가 세입자들의 모임이다. 가족을 위해 애쓰는 소시민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싸우는 누군가를 그렸어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해, 혹은 어떤 강력한 결속을 그리기 위해, 가족 이외의 관계를 ― 그것도 “아버지” 이외의 인물을 ― 상상하지 못한다는 점이 거슬릴 따름이다. 상상력의 부족이건, 상상할 의지의 부족이건, 대중 영화로서의 길을 쉽게 갈 수 있게 해 줄지는 몰라도 사회비평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될 설정일 뿐일 것이다. 또 다른 조력자 변호사(박정민 분)마저 결국 신루미와 결혼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에 ‘연대’라는 감정은 부재하는 셈이다. (《부산행》까지 떠올리니 이 사람 참 가족을 좋아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무엇을 이 영화의 결말로 여겨야 할까. 강제 퇴거에 저항하는 투쟁과, 신석헌과 신루미의 관계라는 두 개의 축이 있는 영화다 보니 결말이라 할 만한 장면도 두 개가 된다. (승리로 평가할 만한 보상이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투쟁은 패배로 끝난다. 신석헌의 힘으로는 퇴거 조치를 막아 내지 못하고 겨우 사람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을 뿐이다. 신석헌은 스스로 감옥행을 택한다. 불행한 끝이다. 한편 몇 년 후 감옥을 나온 신석헌과 신루미는 화해에 이른다. 가족 영화의 필수적인 결말이겠다. 전자가 이 영화의 결말이라면, 어설프게나마 싸울 수 없는 적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후자가 끝이 됨으로써, 모든 갈등은 봉합되고 만다.
이런 악담을 해대는 것이 대중영화 일반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대중영화의 한계 속에서 할 말을 해 내는 영화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염력》에는,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할 자기지시적인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연상호 감독은 “《염력》은 용산 참사를 떠올리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산 참사는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에 더 자세하게 잘 표현됐다”고 말했다고 한다.1 그럼 《염력》이 더 잘 한 것은 무엇일까? (직관적인) 코미디? 좀 더 잘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겨우 이걸 하기 위해 용산참사를 가져다 쓰는 건 부주의하고 무의미한 일이었다고 느꼈다.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3/2018012302024.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