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뮤즈이자 파블로 피카소를 그린 이로 알려진 화가. 아니, 그렇게 광고된 화가. 전시장에는 기욤 아폴리네르가 마리 로랑생을 주인공으로 삼아 쓴 시 「미라보 다리의 여인」이 낭독되고 있었고, 그와 교류했던 많은 작가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실은 이름 이외에는 아는 바가 없었던 그의 작품들을 모은 대규모 전시를 보고 왔다. 표현주의 및 입체파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기 화풍을 지켰던 화가라고 했다. 전시장 벽에 붙은 설명에 따르면 자기 화풍이란 ‘우아함’ 이외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전시 소개는 기욤 아플로네르나 파블로 피카소, 혹은 코코 샤넬과 마리 로랑생의 관계를 설명하는 한편, 그가 포착한 ‘우아함’들에 대해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아하게 그려진 여성들, 당대 파리의 여성들이다. 그러나 흥미로웠던 것은 우아함이라기보다는 그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들이었다.
전시 포스터에 실린 그림은 “입맞춤Le baiser”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한 여성의 뺨에 입을 맞추는 다른 여성을 그린 것이다. (식견 짧은 나로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데) 이 그림은 이를테면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의 “침대에서의 키스Dans le lit, le baiser”를 떠오르게 한다.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런 그림들은 직접적으로 여성 동성애적 욕망을 지시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1 “조각배La barque”, “우아한 무도회, 혹은 시골풍의 춤Le bal élégant, ou la danse à la campagne”, “미의 세 여신Les trois grâces” 등 같은 방식으로 읽을 작품들이 다수 걸려 있는데도 전시 소개에 그에 관한 말이 한 마디도 없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2
삶의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마리 로랑생의 그림은 썩 밝은 분위기는 아니다. 그 스스로 우울했던 시기에는 무채색을 사용했으나 삶이 나아지면서 색채를 다시 쓰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다시 쓰게 된 색채 역시 화려함이나 밝음과는 거리가 멀다. 여성 동성애적 욕망을 담은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그림들도 마찬가지여서, 그 분위기는 관능적이기보다는 음울하다. 이것을, 금지된, 충족되지 못한 욕망에 대한 어떤 마음의 발현으로 읽어도 좋을까.
그림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그로부터 구체적인 욕망들을 읽어내는 것은 내 능력 밖이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마리 로랑생 전을 기획한 이들이 너무 게을렀다는 것 정도뿐이다. 그림들에서 여성 동성애적 욕망을 읽어내지 못한 것이건, 읽어는 내었으나 어떤 이유로 그에 대해 쓰지 않기로 한 것이건 말이다.
마리 로랑생과 동성에의 욕망
안팎 / 2017.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