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영화 《나의 독재자》를 보았다. 포스터 이외의 정보를 접하지 않은 채 본 것이라, 그저 가정 내에서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려니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나의 독재자’는 평범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 아버지는 정권의 필요에 의해 김일성의 대역으로 발탁되어 김일성의 분신으로서 연기 훈련을 받은 이였고, 그 과정에서 고문을 받은 이였으며, 다시 한 번 정권의 필요에 의해 버려진 이였다. 맡은 배역에 너무도 충실해진, 그러나 무대를 얻지 못하고 연습한 연기를 펼쳐 보이지 못함으로써 원래의 제 자아를 잃은 채 김일성이 되어 버린 이였다.
이런 설정에 따라 영화에는 몇 겹의 층이 생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가족 드라마, 정권과 정세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그리고 타인이 되어 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 첫 번째 층과 두 번째 층은 특별할 것은 없고 그날의 내게 있어 큰 관심사도 아니었다. 세 번째 층 역시 특히 참신한 면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내게는 흥미로웠다. 세뇌에 준하는 연기 연습, 그리고 몇 번의 좌절로 인해 자아를 잃고 ‘망상’에 빠져 버린 한 사람 이라는 설정은 참신할 것이 없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그리고 늘 그렇듯 정신 장애를 모티프로 삼은 설정은 의심스럽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나는 담론의 물질성을 믿는다. (저 말이 학계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복적으로 유통되는 어떤 발화들이, 수갑이나 쇠사슬 만큼의 구속력을 지닌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담론을 만드는 것은 다른 담론들뿐만이 아니라 어떤 물질들, 혹은 물질적 조건들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이것은, 저 아버지가 당한 고문만큼이나, 그가 반복한 연기 연습들만큼이나, 물리력 없이 제시되는 여러 말들이 큰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그 말들이 힘을 갖는 데에,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가 처한 물질적 조건들이 큰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주인공은 망상증을 앓는다. 자신이 김일성이 아님을 그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수십 년의 그런 생활 후에도 그는 원래의 제 자아, 구체적으로는 제 아들의 아버지로서의 자아를 여전히 갖고 있다. 또한 제 자아를 잃고 망상에 빠져 들기 전에도, 그는 스스로로서가 아니라 김일성으로서 말하고 행동한다. 대본 없이도, 자연스럽게, 연기 아닌 연기를 해 낸다.
그 덕에 망상에 대해서는 제쳐 두고 나는 생각했다. (혹은 그 때문에, 그리고 나의 무지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김일성이라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수령이라서가 아니라, 김일성이라는 배역을 맡았기 때문에 김일성으로서 행동했다. 배역을 맡은 후 수없이 반복한 연습이 그를 김일성으로 만들었다. 무의식적인 손동작 같이 제 자아를, 그 자아가 사는 세계를 크게 건드리지 않을 수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을 고문한 권력 앞에서도 그는 김일성으로서 말했다. 수령의 권위와 자존심을 갖고서, 수령의 언어로 말했다. 자신이 보복 받을 수 있을 것임을 그는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미 김일성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기 연습은 비디오를 통해 음성이나 손동작 같은 것들을 익히고, 전문가가 써 준 대본을 외우는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살을 찌워 외관을 닮게 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연기는 대본을 벗어난다. 복제에서 창조로 그의 활동은 옮아 간다. 김일성을 따라 하던 그는 어느새 김일성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고문 없이 제시되는 정체성들이 있다. 고문이라고 할 수 없는지는 몰라도, 체벌이니 훈계니 하는 강제들과 함께 제시되는 정체성들이 있다.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면 안 되는지,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하고 어떤 톤으로 말해야 하는지를 지정하는 정체성들이 있다.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남성이나 여성,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정되곤 하는 정체성들이 그런 방식으로 제시되고 작동한다. 이것이 저 아버지에게 주어진 김일성이라는 배역과 얼마나 다를까.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즈음일까, 이렇게 제시된 것들은 기존의 것을 지우곤 한다. 그 전까지는 호명될 뿐 강제되지 않기도 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이 즈음부터면 보다 명확해진다. 그저 어린아이로서 살아 오던 이에게 성별의 규범들이 명시적으로 제시된다. 똑같이 빨갛고 파란 옷을 입는다 하더라도, 그 전까지 그저 그것들이 입혀져 왔다면 이제 파랗고 빨간 옷이 금지되는 방식으로 정체성의 규범들이 구체화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가 파랗고 빨간 옷을 부끄러워 하게 되곤 한다. 파랗고 빨간 옷을 입은 이들을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구체화되지조차 않은 스스로까지를 지우는 방식으로 배역들이 맡겨진다. 알게, 혹은 모르게 연기 연습이 진행된다. 사람들은 대본 없이도 제 배역을 연기하게 된다. 대본 없이, 그러나 대본에 충실하게, 제 배역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순간순간의 모든 만듦이 다음 순간을 위한 연습이자 극작이 된다.
저 아버지는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한다. “수령이라고 아버지 아니간디?” 이 말을 하기 직전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게 수령이 할 말이냐고 타박을 했고, 그 전에 아버지는 김일성이라는 배역을 맡기 전에 아들에게 하곤 했던 말을 수십 년만에 다시 했다. (아버지라는 것 역시 수령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배역이지만, 이 장면만을 떼어 본다면) 배역 뒤에 숨겨진 배우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드러날 때, 연극은 망쳐진다. 준엄하게 대사를 하다 말고 웃음이 터질 때, 갑자기 재채기가 날 때, 객석의 누군가와 눈이 마추지는 순간 대본에 없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장악할 때, 연극은 일순간 중단된다.
배우의 선택인 것은 아니다. 연극이 중단된 그 순간, 웃음을 참을지 마저 웃을지, 아직 간지러운 코를 위해 재채기를 한 번 더 할지 말지,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대사를 이어갈지 말지, 그것은 배우의 선택이지만 당장은 배우에게 그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연극을 마쳐야 할 의무가 있다. 이미 먹은 마음이 있고 이미 서명한 계약서가 있다. 받아야 할 출연료가 있고 쌓아야 할 명성이 있다. 얼마나 가치 있는 극인지, 얼마나 사랑하는 배역인지, 얼마나 받을 수 있고 그 돈으로 해야 할 어떤 일들이 있는지, 무대에서 내려온 그에게 이제 무엇이 가능한지, 이 모든 것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엄청난 연극을 보여주겠다고 아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연습하며 산 아버지가 있었고, 개막이 취소되자 다른 일을 찾은 감독이 있었다.
객석에 앉은 나는 배우들에게 연극보다 재밌는 무언가를 내밀고 싶다. 무대를 내려온 그들과 함께 재밌는 일들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