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쳇바퀴를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형법상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고 있지만, 그 요구를 뒷받침할 만한 경험담들을 모으기는 쉽지 않다. 말 그대로 낙태가 죄이기 때문이다. 낙태 혹은 임신중절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곤경에 처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우므로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요구는 다시 쉽지 않은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하곤 한다, 낙태죄 폐지는 시작일 뿐이라고. 낙태를 둘러싼 담론을 만들고, 그 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위한, 작은 시작점일 뿐이라고 말이다.
한국에서 낙태는 익명의 경험담으로만 전해진다. 내 친구들 중에도 낙태를 경험한 이들이 있고,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런 경험을 한 이는 숱하게 많지만, 지금 모든 것은 비밀리에, 알음알음으로만 전해진다. 어느 병원에서 얼마를 내면 어떤 방식으로 낙태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공식적인 루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왜 낙태 했는지를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낙태가 죄이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익명 게시판의 글들 외에,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이야기들은 많지 않다.
낙태가 죄가 아니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영화 〈24주(24 Wochen)〉(앤 조라 베라치드 감독)는 낙태가 더 이상 죄가 아닌 곳에서 고민되는 낙태를 다룬다. 배경은 독일이다. 독일은 형법 제 218조에서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지만 218조a라는 부칙을 통해 폭넓은 예외사유를 두고 있다. 제 1항은 착상 12주 이내이며 여성이 최소 3일 전에 상담을 받은 것이 확인될 경우, 제 3항은 착상 12주 이내이며 강간 등 성범죄로 이루어진 임신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있는 경우를 예외사유로 인정하며, 이에 더해 제 2항은 임신 및 출산이 임부의 생명 및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해를 미치며 “여성의 관점에서”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를 예외사유로 인정한다. 사실상 여성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중절수술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1
주인공 아스트리드는 유명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그녀의 임신 사실은 대중에게 알려져 있으며, 이 임신은 그야말로 축복받는 임신이다. 그러나 어느 날 의사의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바꾼다. 태아에게서 다운증후군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기대했던, 축복받던 임신에서 하루아침에 이것은 예기치 못한 임신이 되고 만다. 뜻하지 않게 임신한 이들이 누구나 그렇게 하듯, 어떤 이유로든 아직 아이를 가질 준비가 안 된 이들이 누구나 그렇게 하듯, 아스트리드는 출산과 낙태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내가 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이 아이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낙태죄가 폐지되면 낙태가 횡행할 것이라고 열을 올리며 폐지 반대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편에는 낙태죄가 폐지되면 여성이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는, 현실은 그 어느 쪽도 아님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완전하지는 않은 ― 그러니까 어떤 병을 가진 아이는 살릴 수 없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 세계에서, 그리고 태아에 대해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서, 출산으로 이어지든 낙태로 이어지든 임신은 고민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아스트리드는 남자친구와의 상의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지만, 큰 아이 엘레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동생을 갖고 싶지 않아 한다. 어머니 베이테는 양육 문제를 걱정한다. 보모 키티는 아예 일하기를 거부한다. 더 이상 아스트리드의 임신은 축복 받는 임신이 아니다. 게다가 영화는 또 하나의 장치를 마련한다. 의사는 더 무거운 소식을 가져온다. 태아가 선천성 심장 이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낳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아스트리드에게 의사는 분명히 경고한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기르는 것 이상으로 힘든 문제가 될 것이라고. 최소한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며 고통을 감내할/감내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새로이 제기된다.
아이를 낳아도, 낳지 않아도 축복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내 배는 나의 것”이라고 외쳤던 70년대 독일의 운동가들도,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지금 한국의 운동가들도, 어쩌면 충분히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일 것이다. 나의 결정이 온전히 존중 받지 못하는 상황은 말이다. 아니, 결정이 이토록 어려울 수 있음을, 어쩌면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말처럼 딱 떨어지는 것도, 쉽게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의료인류학자 레이나 랩은 『여성을 시험하기, 배아를 시험하기(Testing Women, Testing the Fetus)』(1999)에서 산전 검사가 “모든 여성을 생명윤리학자로 만든다”고 쓴 바 있다. 임신출산을 둘러싼 기술이 발달해 갈수록 경우의 수는 늘어날 것이며 이는 곧 고민이 무거워짐을 뜻한다. 그저 극단적인 사례처럼 보일지 몰라도, 아스트리드를 둘러싼 기술들 ― 태아의 장애를 감별하는 기술부터 산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낙태하는 기술이나 심장이상이 있는 아이를 치료하는 기술까지 이 모든 기술들은 모든 임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술이기도 하다. 여기에 임신 전에 배아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기술까지 상용화된다면, 혹은 인체 바깥에서 임신할 수 있는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임신을 둘러싼 매 분 매 초가 생명윤리를 고민해야 하는 시간들이 될 것이다.
감독은 “우연히 잡지를 통해 ‘독일에서는 태아에게 문제가 있을 경우 출산 직전까지 낙태가 합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창작 배경을 밝힌다.2 이런 그의 말을, 한국어판 포스터에 실린 “영원히 기억할게”, “너를 만나고 사랑한 시간 24주”와 같은 말들과 엮어 읽으면 〈24주〉는 영락없는 낙태 반대 영화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직접 보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영화는 낙태가 횡행하는 잿빛 미래를 그리지도, 여성이 해방된 장밋빛 미래를 그리지도 않는다.
의사, 상담사, 조산사 등 관련 인물 모두가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듯함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은 따뜻하지 않다. 여러 도구를 다루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하는 낙태 수술 장면은 낙태 반대 캠페인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싸늘하다. 영화적으로 다소 과장된 듯한 이어지는 장면들은 낙태의 공포를 배가시킨다. 동시에 아스트리드가 남자친구를 향해 “선택은 내가 하는 거야!”라고 외치는 장면은 낙태권 캠페인 영화에 전형적으로 나올 법한 모습이기도 하다. 아스트리드의 고민만큼이나 요동치는 영화의 온도 앞에서, 관객은 그 고민을 이어 받게 될 것이다.
낙태 일반을 범죄로 규정하는 형법을 가진 (그러면서도 우생학적 사유에 대한 예외를 두는 모자보건법을 가진) 한국에서 곧장 이어받기에는 어쩌면 이른 고민이다. 그러나 마냥 미루어둘 일은 아니다. 낙태죄를 폐지함으로써 어떤 세계를, 어떤 삶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낙태하는 삶이든 태어나는 삶이든을 사회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들에게 무엇을 보장하고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해, 영화 속 아스트리드의 고민을 우리는 이어 받아야 한다.
아스트리드의 낙태를 비난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준다. 출산과 낙태가 그 자체로 누군가의 삶을 (태아의 삶이든 임신한 여성의 삶이든) 규정하는 것이 아님을, 그 삶을 둘러싼 수많은 요소들이 경합함을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 “내 배는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그 배에 대한 모든 결정을 여성 혼자서 짊어지게 할 수도 있는 외침이라는 점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참견이 되지 않으면서 고민의 무게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지금부터 찾아야 한다.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뜻하지 않은 임신, 축복 받지 못하는 임신 앞에서, 출산과 낙태를 고민하는,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여성들이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터놓고 상담할 수 있도록 낙태죄가 사라지기를, 혼자서 낳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기를 수 있도록 장애인 (혹은 다른 어떤 소수자) 을 환영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아스트리드의 마음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독일에서 또한 알리기 부담스러운 임신 7개월 차의 낙태 사실을, 공적인 무대에서 공개한 아스트리드의 마음이 말이다.3
- 물론 이러한 법이 제정되기까지 시민사회와 입법부 내에서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그 역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조국, 「낙태 비범죄화론」, pp. 709-710, 『서울대 법학』 제54권 제3호,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13, pp. 695-728(http://lawi.snu.ac.kr/home/law_2010/4629)을, 자세한 소개로 베른트 슈네만, 한영수 역, 「임신중절」, 『형사법연구』 제 17호, 한국형사법학회, 2002, pp. 279-299(http://www.kcla.net/research_item_list.red?parentId=271)을 참고하라. 현행 독일 형법의 조문은 https://www.gesetze-im-internet.de/englisch_stgb/englisch_stgb.html에서 영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 ↩
- 이지영, 「낙태, 여성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중앙일보』 2017.06.20.(http://news.joins.com/article/21683595). ↩
- 어딘가에 투고하려고 기존의 리뷰보다 길고 친절하게 썼으나 어영부영하는 사이 투고할 타이밍을 놓쳐서 여기에 올려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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