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긴장

《주렁주렁 치렁치렁》이라는 제목 앞에는 “돌봄추리극 중간과정 발표회”라는 말이 붙어 있다.[1]이진희 작·연출, 2025 춤추는허리 돌봄추리극 중간과정 발표회 《주렁주렁 치렁치렁》, 장애여성공감·반달 제작, 서울: 모두예술극장, 2025.12.17. 최종적으로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추리극 ― “범죄의 수사를 주된 내용으로 하여 탐정이나 주인공이 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는 형식의 극”[2][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네이버사전. ― 은 아닐 성 싶다. 범죄가 주는 불안이 아니라 장애여성인 배우들이 타인과 돌봄을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혹은 (자기)돌봄을 필요로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불안이 주제다. 말하자면, 이 공연을 추리극이라 칭하는 것은 여기에 어떤 사건이 있다는 선언에 가깝다.

‘해결’은 어떨까. 그다지 해결을 욕망하거나 기대하지는 않는 듯해 보이는 것이 정말로 이 극이 그래서인지 내가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돌봄을 둘러싼 어떤 사건(성)을 드러내거나 돌봄 자체를 불안이나 스릴을 동반하는 사건으로 규정한다고 할 때 몇 가지 범인을 지목하기는 크게 어렵지 않다. “아프고 싶지 않고, 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 그런 이들로 구성되어 그런 마음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사회,[3]공연 리플렛. 그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장애 당사자 등등. 그렇다면 그 반대의 상황 ― 모종의 긍정들 ― 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기 역시 크게 어렵지는 않겠지만, 대개 현실도 각자의 욕망도 좀 더 복잡하다. ‘추리’가 진행되는 동안, “두려움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가며 만나는 몸-서스펜스”는[4]공연 예매 페이지 소개글. 리플렛에는 “이런 사회에서 질병과 장애야말로 두려움이 되곤 합니다. 이 두려움을 안고, 두려움과 함께, 고통의 주인으로 … 각주로 이동 그저 고조되기만 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적어도 일단은, 돌봄이라는 사건을 채우는 긴장들을 설명하고 해소하기보다는 드러내려 ― 정확히는 증폭시키려 ― 하는 것 같다. 이들 역시 아프고 싶지 않고 잃고 싶지 않고 피곤하고 싶지 않다. 이들의 이야기는 긴장으로 ― 정상신체중심주의적 사회에서의 돌봄 관계가 주는 불안의 긴장이 아니라 상충하는 욕망과 현실의 혹은 욕망과 욕망의 혹은 이런 장애인과 저런 장애인의 긴장으로 ― 가득하다.

공연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무대에 등장하는 미진은 기억력을 잃고 싶지 않다. “이제 제대로 걷지도 못” 하는데 기억까지 잘 못하게 되면, 매번 처음인 것처럼 전화를 반복하는 아버지처럼 되면, 그렇게 흐트러진 삶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구구단을 외고 뜨개질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잠시 후 등장하는 상미는 이미 많은 것을 잊는다. 아마도 오래 그렇게 살아 왔다. 하지만 그 역시 잊고 싶지 않다. 메모를 하고 구구단을 왼다.

그러나 둘의 구구단은 다르다. 미진은 팔 단, 상미는 이 단. 둘이 잊고 싶지 않은 것도 아마 다르다. 미진은 무엇을 잊기 싫은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형태를, 넓히고 지켜 온 운신의 범위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상미가 사소한 일과를 메모하고 되뇌는 것은 기본적인 일상을 ― 제때 씻고 약속을 지키고 화분에 물을 주는 ― 지키기 위해서다.

상미는 자신 역시 괴로워하고 난처해 하면서도 미진에게 ― 명쾌한 ― 조언을 던진다. 걷기가 힘들면 휠체어를 타고 구구단을 틀리면 계산기를 쓰고 기억이 꼬이면 엉킨 타래를 잘라 버리라고. 타인의 곤란을 가벼이 여기는 이들이 쉽게 던지곤 하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상미가 살아 온 방식, 체득한 삶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어떤 말인지 판단하지 않고, 관객에게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고, 둘은 기억하고 끊고 엉키다 들어간다.

정민과 지원은 아파서 자리를 ― 자신과 함께하거나 자신을 보아줄 사람들을 ― 잃는 것이 싫다. 정민은 침대에 누운 채 무대에 오른다. 호흡기였을까, 무언가 기계가 달린 침대였다. “방송 하는 민”이라고 소개했던 것 같다. 소리를 내지도 크게 움직이도 않는 그의 발에 달린 방울이 울리고 은선의 그 대신 말한다. 객석에서 그의 발은 작게만 보이므로, 발로 글자를 쓰고 있단 걸 확신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 벽면에 그의 발을 클로즈업 한 영상이 자리를 잡는 동안[5]처음에는 카메라가 처져 있어서 잘 안 보였다. ― 걸린다.

그가 (틱톡) 라이브로 어떤 이들을 만나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려주는 대신, 이 공연은 종소리에 반응하는 증강현실 기능을 써서 관객을 그저 그의 (가상) 공간에 잠시 들여 보낸다. 그의 내용이나 가치가 아니라 존재만을 제시한다. 자기 소개는 짧다.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도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잃기 싫은지는 물론 그가 타인과 어떤 속도, 어떤 리듬으로 대화하는지 같은 것들까지도 미지의 영역에 남겨진다.[6]카메라는 그의 발을 비스듬하게 비추기에 관객이 그가 쓰는 글자의 생김새를 다 볼 수는 없다. 극중에서 은선은 그가 발로 쓰는 글자를 어렵지 않게 … 각주로 이동 “관종소리”라는 장의 제목으로, 그가 타인의 관심을 원하거나 즐김을 짐작할 뿐이다. 이런 것이 욕망이나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그런 것은 묻지 않는다.

한편 지원은 분명히 말한다. 자신에게는 연극 뿐이고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고. 그간 자신의 장애를 활용해 ― 혹은 그에 맞춘 연기법을 개발해 ― 무대에 올라왔지만 암으로 약해진 몸은 그에게 새로운 연기를 주지 않는다.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할까봐 무섭다. 다른 단원들이 자신 없이 공연을 계속하는 것이 싫을 정도로. 마찬가지로 공연이라는 행위나 그가 그것에 대해 가진 애정과 자부심이 무언가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건강 문제로 이날 무대는 비어 있었다. 그가 여기에 무슨 말을 더하고 싶었는지 모른 채, 연기와 함께 준비했을 영상만 보았다.

화영이 한 것과 같은 말을 ― 지금 이 시점에 ― 그도 하려 했을까, 혹은 하고 싶었을까.[7]실제 공연은 정민-화영-지원 순이었다. 화영도 타인을 잃을까 두렵다. 늘 눈치를 보고 타인을 의식한다. 무대는 그가 용기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혹은 다른 곳보다 먼저 용기를 낼 수 있는 곳인 듯하다. 그 역시 건강도 걱정이다. 아무리 두려워도, 그것이 장애 탓이라 해도, 몸에 “배어 있는” 장애는 잃을 수 없으므로 기어서라도 살(아야 하)리라고, 끝까지 장애로써 살(아야 하)리라고 예상하거나 다짐한다. 오늘은 더없이 화려하게 움직이기로 다짐한다. 역으로, 화영 역시 언젠가 지원과 같은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돌봄에 긴장이 감도는 것이, 이 이야기들이 서스펜스 추리극이 되는 것이, 마냥 쉽게 긍정하고 자부심을 품을 수만은 없어서, 그러기에는 삶이 고단하고 마음이 복잡해서만은 아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자부심”을 이야기하는 은선과 성선의, 그리고 그 어머니 은분의 삶은 자존심을 지키며 살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혹은 자신을 숨겨야 했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느라 묵혀 두었던 대화를 (영상 속에서) 나누지만 순탄치 않다. 세대나 위치, 성격이 달라 충돌하기도 하고 여전히 무언가 숨기기도 한다. 평생을 안 사이이자 같은 장애를 가진 데다 은선과 성선 둘은 쌍둥이이기까지 하지만 서로 다른 것을 원하고 서로 다른 두려움을 갖고 서로 다른 것을 숨기거나 피한다.

이 마지막 장의 화두, 서로 다른 셋이 만나는 지점은 똥이다. 활동지원사에게 미안해지는, 집 밖에서 불안해지는, 그러나 결코 피할 수 없고 중요한 문제로서의 똥. 그래서 둘은 돌봄은 항문 돌봄이라고, 우선 항문과 인사하라고 외친다. 복잡하게 꼬이고 부딪히는 마음들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걷어낼 수 있다 쳐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아무리 비슷한 이끼리어도 서로 너무나 다른 것들, 그야말로 똥 같은 공통점밖에는 확언할 수 없고 그래서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만도 선언이 필요한 것들. 힘들여 일단의 답을 찾는다 해도, 이제 겨우 출발점만을 열어주는 문제들.

기승전결을, 해소를, 엔딩을 기대할 수 없는 서스펜스다. 여기서 돌봄은 말끔하지도 아름답지도 단호하지도 않다. 그저 “주렁주렁 치렁치렁”하다. “두려움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가도 마침내 무찌를 수 있는 악당 같은 것은 나오지 않으리라. 두려움도 불안도 실은 더 깊어지기만 하리라. 여기서 돌봄은 불안이나 불편을 덜거나 해소해주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키우는 일, 키우되 피하지 않고 끌어안는 일, 그에 안기는 일, 긴장과 함께하고 긴장 속에서 서로와 함께할 자리를 찾는 일이다. 다시 그들의 말로 돌아가자면 ― “곰팡이 피는 바닥에서 뒤엉켜 살아”가는 일.[8]공연 예매 페이지 소개글.

References
1 이진희 작·연출, 2025 춤추는허리 돌봄추리극 중간과정 발표회 《주렁주렁 치렁치렁》, 장애여성공감·반달 제작, 서울: 모두예술극장, 2025.12.17.
2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네이버사전.
3 공연 리플렛.
4 공연 예매 페이지 소개글. 리플렛에는 “이런 사회에서 질병과 장애야말로 두려움이 되곤 합니다. 이 두려움을 안고, 두려움과 함께, 고통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 서스펜스-불화’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가며, 장애여성의 돌봄 정치를 더 많이 세상에 내어놓고 싶습니다. 장애와 질병을 다르게 접근하는 과정이 쌓여야 돌봄에 대한 사회적 지식과 사회적 역량이 커져가지 않을까요?”라는 말이 적혀 있다.
5 처음에는 카메라가 처져 있어서 잘 안 보였다.
6 카메라는 그의 발을 비스듬하게 비추기에 관객이 그가 쓰는 글자의 생김새를 다 볼 수는 없다. 극중에서 은선은 그가 발로 쓰는 글자를 어렵지 않게 읽는 듯 보이지만 (또 일부 대사는 쓰는 과정을 생략하고 은선이 말한 후에 그가 방울을 흔드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는 그만큼 수월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가 몇 글자를 쓰면 뒤를 예측해 그의 확인을 받고 다음 단어로 넘어가는 듯했는데, 종종 잘못 읽거나 틀리게 예측했다.
7 실제 공연은 정민-화영-지원 순이었다.
8 공연 예매 페이지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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