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곳에서, 마음껏 춤추지 못하는

내내 이 이야기를, 정확히는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 ― 미국의 어느 무용학원 ― 을 의아해 하며 보았다. “치열한 춤의 세계”라기보단[1]《댄스 네이션》(클레어 배론 작, 이오진 연출, 서울: 두산아트센트 스페이스111, 2023.05.02-20.) 공연 소개. 이하의 직접인용도 모두 같은 곳. ‘잔인한 춤의 세계’, 그러니까 오히려 춤을 금지하는 세계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춤에 진심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춤을 출 수는 없는, 혹은 자신의 춤을 추어서는 안 되는 공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치열한 춤의 세계는 오직 인물들의 마음 속에서만 허락되고 존재하는 듯했다.

《댄스 네이션》의 중심에는 전국 대회 지역 예선을 준비하는 일곱 명의 십 대 무용수와 지도 교사의 관계가 있다. 위계는 명확하다. 늘 1등을 해 온 아미나, 줄곧 2등이었지만 이번엔 가까스로 솔로이스트 ― “간디의 영혼” 역 ― 를 맡은 주주, 이름 없는 배역 혹은 이름만 있는 배역을 맡는 나머지 무용수들, 그리고 이들을 평가하고 솔로이스트를 정하는 교사 패트. 무용수들은 춤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를, 춤으로 누군가의 어떤 고통을 덜 수 있을지를 묻고 그럴 수 있기를 꿈꾸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1등이 되기 위한 춤을 추어야 할 뿐이다. 연습실에 가는 길에는 자신의 춤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만 연습실에서 나오는 길에는 오늘은 어떤 각도와 어떤 속도로 몸을 틀고 돌렸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선생님을 화나게 한 건 아닐지를 걱정해야 한다.

춤으로써 가능해지는 대안적이거나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펼쳐지지 못한 가능성들이 억눌려 있는 공간을 그리는 이야기였다. 이들이 정말로 “춤을 통해 몸의 욕망을 발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춤을 어떤 위치에서 출지를 스스로 정할 수 없는 이들은 지금의 섹슈얼리티도 우정도, 미래의 사랑도, 몽상도, 모두 무대 밖에서 나누어야 했다. 중요하고 소중한 이야기들, 혹은 그런 걸 따지지 않더라도 각자의 가장 힘찬 이야기들을 하나 같이 혼잣말로 흘리거나 친구에게 소리 죽여 말한 후 비밀이라고 덧붙여야 했다.[2]또한, 서로의 존재를 빼면, 이들을 지지하는 것은 모두 “엄마”들이다. 이 이야기에서 춤의 의미를, 아마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잘 하고 싶은 일, 그것을 통해 이루고 싶은 바가 있는 일, 그러나 그 마음만으로는 충분히 허락되지 않는 일, 그래서 중요한 말들은 바깥에서 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춤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상관 없을 테니까. 이 일곱 명에게 춤이 춤이기에 갖는 의미가 있다면 이 이야기 너머에서 ― 어쩌면 이들이 춤을 그만 둔 후에야 ― 비로소 드러나리라고 생각했다.

춤으로써 가능해지는 대안적이거나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펼쳐지지 못한 가능성들이 억눌려 있는 공간을 그리는 이야기였다, 고 썼지만 부러 그것을 그리는 이야기로 읽혔던 것은 아니다. 1등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1등이 되는 것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야기 같아서 내내 의아했던 것이다. 끝내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맡은 안무를 다 해내지 못하는 주주는 역시 춤은 제 길이 아닌지를 고민하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그 빈자리를 채운 아미나는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춤을 추겠다는 선언 ― 이를테면 이 극의 피날레가 되는 ― 을 허락 받는 것은 바로 그 아미나다. 미국에서 쓰인 이야기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미국에 대해서도 (작가에 대해서도, 극장이나 연출가가 이 극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도[3]프로그램북이 있었지만 읽지 못했다.) 딱히 아는 바가 없으므로 계속 의아해만 했다.

강보람과 백우람의 몸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달포 전에는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_선택》(서울: 극단 애인 연습실, 2023.03.22-27.)에서 춤을 추었던, 무대를 벗어나 거리로 나가서까지 춤을 추었던[4]「끝이자 시작인 어떤 시간」. 강보람은 여기에서는 춤을 추지 못한다. 대회에 나가는 일곱 명에 들지 못한 바네사로 잠깐 등장해 발목을 다치고 춤을 포기하거나 어린 시절에는 무용수였으나 일찌감치 춤을 놓았고 지금은 큰 병에 걸린 (딸의 춤을 응원하는) 주주 엄마로 분했다. 이 팀의 유일한 남성 무용수인 백우람은 경쟁팀의 남성 무용수에 비하면 영 스펙터클이 부족한 모양이다. “침묵의 5, 6초”를[5]“백우람의 <침묵의 5, 6초> 또한 배우의 관점에서 장애가 갖는 특이성을 고민하고 활용한다. 언어장애를 가진 백우람에게 ‘말 막힘’의 순간은 … 각주로 이동 훌륭히 활용하지만, 누구든 망설일 만한 때에 ― 짝사랑과 대화하며 ― 침묵했을 뿐이기도 하다.

30대부터 60대까지의 배우들이 10대의 인물들을 연기한다. “관객은 그들이 경쟁하는 춤의 세계를 통해 찬란하게 격동하던 각자의 사춘기를 떠올리고, 그 당시 경험한 사건과 감정이 여전히 우리 몸에 남아있음을 발견할 것”이라는 말을 보면 10 대를 지나 다양한 시점에 살고 있는 관객들을 향한 공연인 듯하다. 나의 지난 10대를 생각하기보다는, 더 이상 청소년도, 지도 교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학생도, 아예 1등을 꿈꾸는 사람도 아니게 된 시점에도 여전히 춤을 금하는 세계에 살고 있을 30대나 60대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보았다. 과거의 사건과 감정이 새겨진 몸들이 아니라, 여전히 같은 것을 반복하며 혼잣말과 비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을 몸들을.

References
1 《댄스 네이션》(클레어 배론 작, 이오진 연출, 서울: 두산아트센트 스페이스111, 2023.05.02-20.) 공연 소개. 이하의 직접인용도 모두 같은 곳.
2 또한, 서로의 존재를 빼면, 이들을 지지하는 것은 모두 “엄마”들이다.
3 프로그램북이 있었지만 읽지 못했다.
4 「끝이자 시작인 어떤 시간」.
5 “백우람의 <침묵의 5, 6초> 또한 배우의 관점에서 장애가 갖는 특이성을 고민하고 활용한다. 언어장애를 가진 백우람에게 ‘말 막힘’의 순간은 양가적으로 경험되는 문제적인 시간이다. 발화가 지연되는 이 짧은 시간은 관객의 인내를 요할뿐만 아니라 배우 자신에게 큰 힘듦과 두려움을 안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시간은 백우람이 배우로서 가지는 고유한 매력이 잠재되어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발화 직전의 긴장하고 경직되는 근육, 예측불가능하게 생겨나는 운동과 리듬, 불시에 터져 나오는 폭발적 에너지 등은 바로 그 ‘침묵의 5, 6초’에서 기인한다. 그렇기에 백우람은 짧고도 고통스러운 그 침묵을, 무대 위에서 생생히 살아있는 순간으로서 기꺼이 껴안는다.” 하은빈, 「재구성되는 몸의 기억」, 웹진 《연극in》, 2020.

여전히 그곳에서, 마음껏 춤추지 못하는」에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나는 은연중에 강보람의 춤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계속해서 계획과 예상을 비켜나고 어긋나는 몸, 따라서 약속대로 이동하거나 움직이게 하려는 안무의 힘을 거꾸러뜨리는 강보람의 춤을. 그러니까 이를테면 강보람이 아미나나 주주로 등장하리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동안 안무와 눈부시게 겨루며 질문을 던져온 그가, <댄스 네이션>에서 춤과 대결하며 춤의 나라에 모종의 균열을 가하리라고. […] 그럼에도 더 큰 틀에서 <댄스 네이션>은 춤의 나라 바깥의 몸을, 그 ‘무국적자들’의 춤과 몸과 삶을 충분히 보여준다. […] <댄스 네이션>은 춤의 나라가 언제나 문밖으로 추방해온 바로 그 몸들을 데려와, 안무 밖으로 튀어나오는 보풀과 솔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춤을 추도록 한다.”

    하은빈, 「춤의 나라와 무국적의 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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