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의 『멍키 스패너』를[1]Primo Levi, La chiave a stella, Einaudi, 1978; 김운찬 역, 돌베개. 2013. 읽기로 한 것은 ‘고독한’ 작업으로서의 글쓰기를 생각하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고독해도 좋은’ 작업으로서의 글쓰기다. 글쓰기란 혼자 골방에 앉아서 쓰거나 아무런 지침도 없이 홀로 문장을 정해야 하는 일이기보다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아도, 심지어 독자조차 마주치지 않아도 좋은 일, 모두 홀로 정해도 좋은 일이니까. (물론 어떤 일이든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다.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설비나 그런 설비를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한 영역만 아니라면, 들에서 거둔 씨를 홀로 기를 수도 있고 어떻게든 캐어 온 철광석을 홀로 녹이고 두드려 연장을 만들 수도 있겠지. 문장은 머리 속에서도 쓸 수 있다는 점이, 그보다 더 적은 재료만으로 가능한 일을 대기 쉽지 않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가장 자율적일 수 있는 일에 속하지만 ― 구태여 독자까지 가지 않아도 ― 쓰는 이의 머리 속은 자신이 아닌 존재로 가득한 법이므로 실은 도무지 외로울 수도 자율적일 수도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 곤란함을 생각하며, 조립공 파우소네의 이야기를 읽기로 했다. 대개는 여러 사람이 협업하므로 “조립공들은 언제나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지만(15) 궁극적으로는 사람보다 재료가 중요한 일이라는 점에서 글쓰기보다도 한층 더 고독해도 좋은 일이다. 그의 일이 설계가 아니라 이미 설계되어 있는 것, 그러니까 정해져 있는 것을 구현하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다른 조립공은 필수적이지 않다. “세 달 여유에 약간 재빠른 조수 두 명만 준다면, 나 혼자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22) 말도 크게 이상할 것 없다. 조수와 함께라면 혼자가 아니지만 조수는 기계로 대신해도 되니까. 조수와 함께래도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조립공 혼자니까. 그러나 그는 그다지 홀로인 사람은 아니었다. 이 책의 대부분은 파우소네가 화자에게 들려주는, 여러 설비를 조립하러 방문한 여러 나라에서 여러 사람들 혹은 상황들과 얽히며 겪은 일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기대했던 것, 자신의 재료와 고요히 대면하는 “호모 파베르”의[2]“[파우소네는] 모든 작업을 마치 첫사랑처럼 대하고 거기에다 영혼을 쏟아붓는다. […] 이 작품은 노동하는 인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인간, … 각주로 이동 이야기는 그다지 읽지 못했다. 사람이든 원숭이든 홍수든이 금세 끼어들어 고요한 대면을 막았다. 파우소네와 화자, 두 이야기꾼의 이야기로 읽었다.
파우소네는 자기 일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이 책의 화자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불행히도 그건 소수의 특권이다) 지상의 행복에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 ― 그러니까, 파우소네가 아니라 독자에게 말 ― 한다.(121)[3]뒤는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 각주로 이동 하지만 나는 줄곧, 파우소네가 제 일의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궁금해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심했다. 그는 “온 세상의 조선소, 공장, 항구를 돌아다니는 이 일”을 통해 “정글이나 사막, 말레이시아에 가보는” 어린 시절의 “꿈이 진짜로 실현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10) 외국에 파견 나가 현장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 영역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일을 멈출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며 그렇게 일을 마치면 한동안 휴식을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립공의 일 자체 ― 아마도 이렇게 선을 그으려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문제이겠지만 ― 를 사랑하는지 그 일이 가져다주는 나머지의 삶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는 뜻이다.
다만 갖가지 설비를 조립하고 설치하는 조립공이라는 일에 대해 조금 더 생각했다. 말하자면 중간지대의 일이다. 턱없는 자유와 턱없는 예속 사이의, 무언가를 처음부터 창조해 내야 하는 막막함과 단순 반복의 지루함 사이의 일이다.[4]파우소네의 아버지는 구리를 가공하는 장인이었다. 그는 파우소네가 “당신처럼 온통 그을음으로 시커멓고 겨울에는 얼어붙는 작업장에서 하루 열두 … 각주로 이동 그는 설계하지 않는다. 특정한 기능을 특정한 장소에 구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기 위해 하나하나 조사할 필요가 없다. 설계도에 명시되어 있는 부품을 설계도에 명시되어 있는 위치에 설계도에 명시되어 있는 구조로 조립한다. 다만 그 설계의 시공 전체를 조망하고 감독한다. 어느 날은 종일 나사를 조이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겠지만, 다른 위치에 다른 이유로 놓인 나사를, 그 이유를 이해하면서, 조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면, 바로 이 점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믿을 구석이 주어져 있다는 점. 믿을 수 있는 이유를 알 만한 능력과 그 능력에 대한 믿음이 또한 있다는 점.
그렇게 치면 “멍키스패너”라는 제목은 조금 곤란하다. 이 책의 원제는 La chiave a stella다.[5]영국에서는 『렌치The Wrench』, 미국에서는 『원숭이의 렌치The Monkey’s Wrench』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이 책에는 원숭이도 나오고 렌치도 나오지만 둘이 … 각주로 이동 공구도 이탈리어도 모르지만, 아마도 직역하자면 별 모양 스패너 쯤 될 것이다. 양이빨의 폭을 조절할 수 있는 멍키스패너와 달리 둥근 고리 안에 별 모양 이빨이 달려 있는, 조이고 풀 수 있는 너트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 한국에서는 링 스패너나 폐구 스패너 쯤으로 불리는 모양이다. (나는 렌치라고 부르며 자랐다. 어느쪽이든, 속이 꼭 별모양은 아닌 것 같다. 개구 스패너는 스패너라고 불렀다.) 조금은 과하게 해석하자면, 모든 너트가 규격에 맞게 나와 있다는 확신, 이리저리 대어보지 않고도 단 번에 맞는 크기의 공구를 집어들 수 있다는 자신이 드러나는 전문가의 도구, 임기응변이 아니라 믿을 구석을 향하는 도구다.
무엇이 왜 거기에 있는지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와 상태로 그곳에 있는지도 믿고 기댈 수 있는 삶이라는 뜻이다. 그날 들어온 재료의 상태 ― 쇠의 순도나 강도든 나무 옹이의 위치든 ― 에 따라 경험과 감각을 토대로 재료에 맞는 가공을 해야 하는 전통적인 장인의 삶과도 다른, 현대적 호모 파베르의 삶이다.[6]물론 장인의 삶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마침 최근에 『형태의 기원』(크리스토퍼 윌리엄스 저,고현석 역, 이데아, 2023)에서 몇 줄을 읽었을 … 각주로 이동 턱없는 예속과 분업을 가하는 바로 그 현대의 규격화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삶. 국역본에서는 본문에도 멍키스패너가 등장하지만 원문에는 폐구든 개구든, 조절할 수 없는 혹은 그럴 필요가 없는 스패너만이 나온다. 파우소네는 부품이 “규격에 맞지 않았고 […] 하나하나 모두 줄로 다듬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모든 부품이 규격대로 되어야 하고, 현장에서 순서대로 확인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파우소네는 절대 일하지 않을 테니까, 칼라브리아에서 다른 조립공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인물이다.(146). “이 세상에서는 그냥 당하게 놔두면 끝장이니까”. 그리고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휴가를 떠난다. 회사에서도 그것을 합당하게 여긴다.
그렇게 찾아간 바다 이야기를 하며, 파우소네는 이렇게 말한다. “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아니, 전혀 극복하지 못했고 단지 익숙해졌다고 말해야겠군요.”(149)
화자는 언젠가 파우소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커다란 장점 중 하나는 바로 불분명하고 모호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말하거나 말하지 않고, 모든 신중함의 규칙을 넘어서서 아주 자유롭게 창안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세우는 구조물에 사람들은 고압 전선을 통과시키지 않고, 만약 무너지더라도 아무도 죽지 않고, 바람에 저항할 필요도 없다고. 간단히 말해 우리는 무책임하고, 그래서 어느 작가의 구조물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가 기소당하거나 감옥에 가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관용의 한계 안에서 또는 관용을 넘어서서 일하는 것은 우리 직업의 장점이었다. 조립공과 달리 작가는 관용을 넘어서거나 불가능한 짝짓기를 하는 데 성공하면 행복해하고 칭찬을 받는다.”(77)
↑1 | Primo Levi, La chiave a stella, Einaudi, 1978; 김운찬 역, 돌베개.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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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파우소네는] 모든 작업을 마치 첫사랑처럼 대하고 거기에다 영혼을 쏟아붓는다. […] 이 작품은 노동하는 인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인간, 즉 호모 파베르에게 바치는 헌사가 된다.” 김운찬, 「호모 파베르 예찬」(작품 해설 및 역자 후기), 이 책 266쪽. 혹은 “혹시 독자들 가운데 공무원이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또 변호사라면 결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이제껏 제대로 얘기된 바 없는 호모 파베르, 곧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능력을 지닌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타임』지 칼럼니스트 버나드 레빈, 이 책 뒤표지. |
↑3 | 뒤는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바로 그곳에 가장 적게 가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더욱 많이 말하고 더욱 요란하게 말하는데, 슬프고도 신비로운 현상이다. 직업을 찬양하기 위해 공식적인 의례에서는 교활한 수사학이 동원되는데, 그것은 냉소적으로 칭찬이나 메달이 임금 인상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들고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고찰을 토대로 한다. 하지만 정반대의 수사학도 존재하는데, 냉소적이지 않지만 엄청나게 멍청한 수사학으로, 직업을 폄하하고, 비천한 것으로 묘사한다. 마치 자기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직업은 단지 유토피아에서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도 없어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마치 일할 줄 아는 사람은 정의상 하인이며, 반대로 일할 줄 모르거나, 잘못 알거나,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많은 직업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슬프게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입관과 증오를 갖고 현장으로 내려가는 것은 해롭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평생 동안 직업을 증오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직업의 결실이 일하는 사람의 손에 남아 있도록, 직업 자체가 형벌이 아닌 것이 되도록 싸울 수 있고 또 싸워야 한다. 하지만 직업에 대한 사랑 또는 반대로 증오는 내부적이고 선천적인 것으로,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그 직업이 이루어지는 생산 구조에 의존하기보다는 개인의 삶에 더 많이 의존한다.” 다음 주석에 나오는 파우소네의 말은 “이런 [화자의] 생각의 흐름을 직감한 것처럼” 다시 시작한 이야기의 일부다. |
↑4 | 파우소네의 아버지는 구리를 가공하는 장인이었다. 그는 파우소네가 “당신처럼 온통 그을음으로 시커멓고 겨울에는 얼어붙는 작업장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하거나 또는 이주민으로 집시처럼 마차를 타고 위로 아래도 돌아다니더라도, 주인 밑에 있지 않고, 공장에 있지 않고, 조립 라인에 매달려 평생 동안 똑같은 동작을 하기 않”기를 바랐다. “그래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또한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에 만족했다면, 분명히 나는 지금도 조립 라인에 매달려 있을 겁니다.”(123) |
↑5 | 영국에서는 『렌치The Wrench』, 미국에서는 『원숭이의 렌치The Monkey’s Wrench』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이 책에는 원숭이도 나오고 렌치도 나오지만 둘이 같은 이야기에 나오지는 않는다. |
↑6 | 물론 장인의 삶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마침 최근에 『형태의 기원』(크리스토퍼 윌리엄스 저,고현석 역, 이데아, 2023)에서 몇 줄을 읽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