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앉아 있는 것부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는 하지만 이른바 ‘참여’를 싫어하는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무대에 오르거나 무대와 객석을 향해 무언가 말하거나 배우나 관객들과 함께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나는 조용히 앉아 있다 나가고 싶다. 그래서 불안감에 휩싸인 채 객석에 앉았다. 다행히 별다른 일 ― 진행자가 관객을, 정확히는 나를 지목해 말을 시킨다든가 하는 ― 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서 보고 나왔다.
《연극연습 4. 관객연습. 〈사람이 하는 일〉》(고주영 기획·제작,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공동제작·출연, 이진희(춤추는허리) 구성·연출, 서울: 헤이그라운드 성수 시작점, 2021.12.15-19.)는 아우구스투 보아우Augusto Boal 식의 “토론연극”이다. “억압자”가 문제적인 상황을 만들고 “조커”가 관객에게 개입을 요청한다. “조커”는 관객에게 언제든 공연을 중지시켜도 좋다며 그럴 때 쓸 구호를 같이 만들자고 말한다. 이것이 시작이다. 이윽고 크고작은 상황들이 이어진다. 예컨대 “억압자”가 지하철을 타고 혼자 이동 중인 지적장애인을 발견하고는 당사자의 의사는 무시한 채 목걸이에 적힌 연락처를 보고 복지관에 전화해 귀가시킨다거나 지체장애인의 전동휠체어에 마음대로 기댄다거나 하는 일들 ― 하나의 서사를 이루지 않는 ― 이 벌어진다.
친절하지는 않다. 진행자는 아무런 설명 없이 스스로를 “조커”라 칭한다. 비장애인 역할을 모두 장애배우들이 연기한다. 관객이 개입하지 않으면 공연은 시작되지 않거나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지목하지는 않지만 겨우 용기를 낸 이에게 집요하게 다음 한 마디를 요구한다. 다만 고통스런 장면을 멈추고 싶었을 뿐인 관객은 아무 데로도 도망치지 못한 채, 확신조차 없이, 보다 나은 상황을 연출하고 연기해야 한다.
기획자 고주영은 “『어쩌면 이상한 몸』에 [춤추는허리의] 지원 님이 ‘화가 나서 소리치고 싶어도 보조를 못 받을까봐 소리를 지르지 못했던 배우가 연습할 때 소리를 질러보면 일상에서도 가능해질 수 있다’라고 쓴 구절”을 인용하며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해 연습을 하는 것이 토론연극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동료시민으로 함께 살기 위해 ‘차별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것이 그의 기획의도다. 조금 더 밝혀두자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결과적으로 차별에 가담”해버린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라는 질문이 생겼을 때 ‘토론연극’에 부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 동기가 되었다.[1]이하에서 인용은 모두 공연 리플렛에 실린 이진희, 진성선, 고주영 대담 「어떤 역할을 하시겠습니까」에서.
그러나, (그 자신의 우려대로) 차별하지 않는 연습이라기엔 “공연의 에피소드나 연습의 내용이 너무 소소하다.” 물론 작은 사건들이 모여 일상을 이루므로 크기가, 혹은 ‘심각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작아도 충분히 복잡할 수도 있다. 극중의 억압자 역시 종종 선의를 갖고 있다. 하지만 무대가 제시하는 상황에서 여러가지 가치가 ― 적어도 이 공연에 굳이 찾아온 이들이 중시하는 가치끼리 ― 충돌하는 경우는 적다. 그런 의미에서 소소하다. 이렇다 할 토론 없이도, 공연을 멈춘 한 사람 한 사람은 대개 어렵지 않게 모범적인 답을 제시한다. 무언가 놓치기도 하지만 한 명쯤 더 나서서 채우면 상황은 대강 정리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행해지는 연습은 차별 없는 상황을 만드는 연습보다는 대개 차별적인 상황을, 문자 그대로, 멈추는 연습이다. (내가 간 날의 구호는 꾸밈없이 그저 “멈춰!”였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러시면 안 되죠,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멋대로 하지 말고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세요, 같은 말들. “배우가 연습할 때 소리를 질러보면 일상에서도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할 때와 똑같은 만큼의 연습이다. 상대를 압도할 논리나 카리스마를 갖추는 연습이 아니라 그저 참고 피하고 숨고 사라지지 않는 연습, 일단 시작하는 연습. 일종의 자기방어훈련으로 이해했다. 표면상 격투기 훈련이지만 사실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실질적인 호신술은 부차적인,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는 ― 내가 그만한 힘은 있다는 것을 ― 확인하는 훈련. 용기를 찾는 훈련.
그리하여 내가 본 것은, 슬픈 사람들의 움직임이다. 분노를 폭발시키는 연습도 누군가를 구하는[2]”구하는”이라는 표현이 떠오른 것은 “비장애인 역할을 모두 장애배우들이 연기”하는 공연을 내가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 배역임을 … 각주로 이동 연습도 아닌, 스스로를 슬픔에 가두어두지 않는 연습. 에피소드가 한참을 진행되도록 객석은 대개 조용했다. 이따금의 한숨을 빼면. 무대의 승강이가 늘어진다. 억압자는 한 번으로 이미 과한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차별 당하는 이는 무력한 저항을 반복한다. 조커는 전전긍긍한다. 그쯤 되면 한 사람이 멈춰, 하고 외친다. 고군분투하는 진행자를 보기 안쓰러워서거나 끊임없이 괴롭힘 당하는 이를 보기 안쓰러워서거나 더 이상 스스로를 그 괴로움 속에 방치하고 싶지 않아서거나. 다음으로 해야 할 말 ― 저 차별과 억압을 멈추고 평등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 을 알고는 있지만 준비하지는 않았고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분노든 희망이든 확신이든 넘치는 힘으로 움직인 것이 아닌 그는 또 한참을 망설인다. 오직 슬픔을 걷기 위해 주저하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슬픔은 한 겹 더 있다. 이 상황을 멈춘다 해도, 더 나은 것을 상상한다 해도, 억압자가 단숨에 새사람이 될 리는 없다는 사실. 그는 아무데로도 가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이 세계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 상황이 단순하므로 실은 해법도 단순하다. 게다가 관객은 전권을 위임 받은 상태다. 억압자를 내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가던 길을 가고 하던 일을 하게 두면 된다. 필요한 조력 ― 활동 지원 같은 ― 을 당사자의 의사대로 제공하면 된다. 하지만 슬픔을 이미 아는 이들은 여간해서는 그런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억압자는 기껏해야 몇 미터를 밀려 날 뿐이다. 관객은 여전히 코앞에 있는 그와 대거리를 한다. 타일러도 보고 단호하게 말해도 본다. 차별하지 않는 연습은 결국 차별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이 된다.
고주영의 경험대로 나 역시 불의의 공모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조금 전까지는 그저 한숨만 쉬며 머뭇거리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실은 그에 그치지 않고 종종 직접적이고 주된 억압자가 된다는 점에서도) 이것은 자기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이기도 하다. 차별에 분노하고 선을 긋고 좋은 사람이 되는 연습이 아니라 차별과 함께 차별과 얽혀 사는 사람, 그러나 차별을 아는 사람,[3]”차별금지법은 차별하는 사람을 처벌하자는 법이 아니라 무엇이 차별인지를 인식하게 하는 법”(이진희, 리플렛),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 각주로 이동 차별에 슬퍼하는 사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한층 더 슬퍼하는 사람, 그러나 그저 슬픔 속에 머물지는 않는 사람, 슬픔을 참지 못해 무어라도 하는 사람, 그리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되는 연습.
↑1 | 이하에서 인용은 모두 공연 리플렛에 실린 이진희, 진성선, 고주영 대담 「어떤 역할을 하시겠습니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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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구하는”이라는 표현이 떠오른 것은 “비장애인 역할을 모두 장애배우들이 연기”하는 공연을 내가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 배역임을 사전에 소개했음에도 나는 종종 잊었고, 그런 채 보는 상황은 아주 기이했다. 장애인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상황에 비장애인인 진행자와 대부분 비장애인인(정확히 말하자면 객석에 있는 것 만으로 티가 나는 장애는 없는) 관객들이 개입하는 모습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배우 진성선은 억압자 역할을 맡음으로써(또한 억압자의 모습을 구체화한 공동창작 과정을 통해) “그들이 그런 차별적인 말을 하는 구조와 논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어떻게 더 깨줘야 할까를 고민하게 된 것 같다”고 술회한다. 연출이자 조커를 맡은 이진희는 이에 동의를 표하는 한편 “정체성이 여러 위치에서 발생하고 충돌하기도 하는 의도치 못했던 효과”, “당사자주의에 대한 묘한 긴장감” 등이 발생한 점을 들어 “장애여성 배우로만 하기를 잘했다”고 덧붙인다. |
↑3 | ”차별금지법은 차별하는 사람을 처벌하자는 법이 아니라 무엇이 차별인지를 인식하게 하는 법”(이진희, 리플렛),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당사자들의 역량을 길러줍니다”(차별금지법제정연대), 혹은 박종주, 「차별금지법, 우리의 삶을 셀 수 있도록」 참고. |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보며 무력감에 젖었던 날이 생각납니다. 불평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보며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어요. ‘그저 한숨만 쉬며 머뭇거리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지요. 내리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응원합니다’, ‘괜찮습니다’, ‘화이팅’ 같은 간단한 말이라도 외치고 뛰어나올 걸 그랬나, 몇 날 며칠 머리에 이 순간이 달라붙어 짙은 후회로 남습니다. 어쩌면 연습은 저에게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