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대지DRY LAND》(루비 래 슈피겔Ruby Rae Spiegel 작, 윤혜숙 연출, 서울: 예술공간 혜화, 2018.12.20-30.)은 원래 지난 해 8월 상연될 계획이었으나 제작이 중단되었다가 12월에 무대에 올랐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홍보물에서 관심을 끌었던 몇 가지가 있다. 수영장 물을 찍은 사진과 “마른 대지”라는 제목이 대비를 이루는 심플한 포스터, 흔히 접할 수 없는 ‘청소년 낙태’라는 소재,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매 사이트에는 없지만) 홍보 게시물에 인용된 “낙태 장면은 있는 그대로 보여져야 한다”는 작가의 말.1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하는 이 극이,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가 궁금해졌다.2
극장에 들어선 관객을 맞는 것은 티케팅 부스에 적힌 문장이다. “트라우마 주의(Trigger Warning): 본 공연은 극의 흐름상 욕설 및 성적인 대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출혈장면이 연출되오니 관람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약간의 후회를 했다. 누군가에게 상처나 불쾌감을 줄 수 있을 무언가에 대해 미리 알리는 섬세한 태도는 소중한 것이지만, “흐름상” 구체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의 ‘흐름’을 위해서라면 “이 사람은 욕을 많이 쓴다”, “피가 많이 흘렀다” 정도의 말로도 충분하다. 욕설이나 피와 같은 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로 한 것은 ‘흐름’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이 줄 수 있을 어떤 감각적 자극 때문이다. 그 자극이라는 것이 포르노적인 자극일지, 언어와 이성을 벗어나는 층위에서의 제시와 설득을 위한 자극일지 아직 알 수 없으므로, 그리고 대개 이런 것은 기대할 만한 일이 못 되므로, 나는 약간의 후회를 했다.
어쨌든 극은 시작되었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유산유도제를 구입할 수 있는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혼자 해결할 만큼의 돈이나 그만큼의 돈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지지자를 갖지 못한 청소년들이 주인공이므로 한국의 상황과 아주 멀지는 않다. 뜻하지 않게 임신하게 된 이의 임신중지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이조차도 주먹으로 배를 때려 주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표백제나 세제를 사용해 볼까하는 고민까지 하던 중에 가까스로 약을 구하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여전히 편히 누울 수 있는 곳은 없다. 공적인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 게다가 사적인 지원들마저도 쉽게 기대하기 힘든 상황. 직접적으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긴 “낙태 장면”이 무대 위에서 이어졌다.
극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피는 말 그대로 피였고3, 욕설이라는 것은 ‘이 사람은 욕설을 사용하는 사람이다’를 말하는 수준을 넘지 않았다 ― 욕설이라는 요소를 가지고서 억지스럽게 인물의 고뇌 같은 것을 표현하려 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요 인물들은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고민하며 용이하고 안전한 방법을 실행할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 는 단순한 설정을 넘어 여러가지 이야기들의 결절점으로서 구성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걸레’로 보이게 하는 것, 안전하지 않은 방식으로라도 임신중지를 선택하는 것 등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을 지키기 ― 나는 여기서 ‘지키다’라는 말을 단순히 ‘보호하다’라는 말보다는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 ― 위해 택하는 몇 가지 방법들이 아마도 가장 주된 이야기들이겠지만, 이와 함께 동성 섹슈얼리티, 또래집단 여성들 사이의 관계 맺기, 장애, (대도시가 아닌 곳이 갖는) 지역성 같은 것들이 골고루 ― 때로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 무대 위에 오른다. 예상치 못하게 임신을 하고, (고민의 시간이 길든 짧든) 임신중지를 결정하고, 주어진 물적, 인적 자원들을 어떻게 배치해 그것을 실행하는지 보여주는 이 극은 온갖 요소들을 빼 놓지 않고 거론함으로써 임신과 그것의 중지가 단순한 문제, 아무런 환경적 영향 없이 벌어지는 독립적인 사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낙태 장면은 있는 그대로 보여져야 한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이 “있는 그대로”라는 것은 ‘그 복잡성을 모두 유지하고’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희곡을 쓴 작가, 무대를 구성한 연출가, 자신들의 몸으로 그것을 실현한 배우들, 이 모두가 저 말을 충분히 염두에 두었다고 여길 만하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이것은 단순히 무작위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취사선택하고 재구성해 만든 하나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낙태 장면”을 이런 식으로 설정하는 것이 낳는 효과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홍보물에는 “이 연극은 발랑까진 10대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실리고, 인물들간의 지지 관계는 성애적 요소들과 함께 그려지고, 게다가 동성애자로 지목되는 인물은 어딘지 관계맺음에 서툴며,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언급되는 장애인들은 (대개는 조심스러운 문장들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이유 없이 희화화된다. 세상엔 저런 사람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 무대에 오르는 인물과 사건은 쉽사리 하나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기에 ― 굳이 이런 식의 설정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여러 순간들은 다소 곤란했다.
물론 이것이 《마른 대지》의 책임만은 아닐 것이다. ‘무대에 오르는 인물과 사건은 쉽사리 하나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말은 어떤 조건 하에서만 성립한다. 그런 류의 인물과 사건이 실제로 전형화된 문법을 따라서만 반복적으로 재현될 경우, 혹은 그 하나가 곧장 전형이 되어버릴 만큼 재현이 양적으로 적은 경우. 적어도 한국에서 임신중지를, 그것도 청소년의 임신중지를 진지하게 다루는 작업은 흔치 않으므로, 《마른 대지》가 (‘갖는’다기보다) 겪는 문제는 후자에 속할 테다. 주인공은 유산유도약물을 구해 복용한다. 임신중지 과정을 수행할 깨끗하고 안전한 공간은 물론 갖지 못했으므로, 복통을 견디고 피를 쏟아내는 것은 체육관 탈의실에서다. 당사자와 그 친구가 피를 닦지 않고 자리를 벗어나는 것, 건물 관리인이 아무런 감정 표현 없이 묵묵히 피를 닦는 것. 나로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어떤 장면들을, 저런 식의 전형화에 이 작품이 저항하는 방식들로 여겨보기로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으로도 “낙태 장면은 있는 그대로 보여져야 한다”는 문장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에 어디까지를 담으려 한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고, ‘낙태 과정’이 아니라 “낙태 장면”이라는 말을 쓴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찾아본 대본에 적힌 주석은 이런 문장들로 되어 있었다. “극중의 낙태/유산abortion은 정면으로head-on 보여져야 한다. 상당한 양의 피가 흘러야 하며, 에이미 역의 배우는 드러나는 것을 편안히 느껴야 한다. 그가 숨겨지거나 너무 가려진다면, 마치 낙태/유산이 보여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은 보여져야 한다It is meant to be seen.”4 저 문장은 이 극에 관한 것으로, 더욱이 (“장면”이라는 단어 없이도) 물리적 층위에서 정의될 만한 낙태/유산의 순간에 관한 것으로 축소되지만, 이 장면을 이렇게 연출하는 것은 임신중지라의 전 과정을 대하는 어떤 태도를 함축한 것이므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정면으로”라는 말이 오히려 중요할 것이다. “낙태 장면은 있는 그대로 보여져야 한다”는 말이 곧 연극(을 비롯해, 이 일을 다루는 여러 방식들)이 “있는 그대로”를 포착해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면, “낙태/유산은 정면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말은 초점을 조금 달리 한다.
누구도 포착하지 못하는 무언가는, 그것이 ‘있다’고 해도, 보여줄 수도 볼 수도 없다. 게다가 글이든 무대든 이런 종류의 것들은 언제나 무언가를 옮겨 온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실은 ‘그것의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를’ 정도 이상을 뜻할 수 없다. 결국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실천을 위해서 창작자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 대개는 “낙태 장면”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 교우관계 같은 것들까지를 포착해 내었다 ―, 또한 무엇이 그곳에 있는지를 ― 예컨대 최초의 희곡 속에서 그곳에는 영어로 말해지는 문장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낙태 장면”에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서울에서의 공연에서는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들이 읊어져도 좋았다 ― 따져야 하는 위치,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따질 수 있는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정면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주문 아래에서 창작자의 지위는 조금 다르다.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전형적인 극장에서 ― 이 극이 상연된 곳은 그런 극장이었다 ― 관객은 자신의 시야를 뜻대로 정할 수 없다. 이런 관객들에게 “정면으로”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멋대로 가리지 않는 것, 무엇을 보여줄지 취사선택할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함부로 생략하지 않을 의무를 지는 것, 이런 것이 창작자의 위치가 될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관객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을 의무를 지닌다. “있는 그대로”라고 말해도 좋을 무언가를 파악하기 위해 관찰하고 판단할 권리를 이제는 조금은 가져도 좋을 것이다. 연극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창작자와 관객을 호명했지만, 이것은 흔히들 말하는 세계라는 무대를 창작자이자 배우로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어떤 사건을 접하고 생각할 때 취해야 할 태도일 것이다. 피하지 않을 것. 피하기 위해 생략하지 않을 것. 피가 고인 체육관 바닥을 닦으며 놀라기는커녕 짜증내지조차 않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관리인의 마음이 어쩌면 그런 것일 테다. 판단하기 전에, 우선, 마주할 것. 우선, 다가갈 것. 우선, 닿을 것.
- https://www.facebook.com/pforl/posts/2170733363178348 ↩
- 내가 관람 예매를 한 것은 12월 18일이며 조금 전 찾아본 저 게시물은 12월 23일자로 올라온 것이므로, 공연 전에 저 문장을 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백건대, 관심을 갖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관람까지 한 것은 극단에서 관람객을 대상으로 『배틀그라운드』(성과재생산포럼 기획, 후마니타스, 2018) 증정 이벤트를 연 때문이었다. ↩
-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피의 양과 성상에 대해 약간의 의문이 남아 있다. ↩
- https://www.dramatists.com/previews/5183.pdf. 대본의 일부를 담은 이 파일의 5쪽에서 가져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