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생각한다. 오래 전의 작품이란 더 이상 작품이 아니라 사료이지는 않은지. 동시대의 것이라 해도 서로 알지 못하는 문화권에 속한 것이라면 마찬가지일 테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 감정을 다루는 고전, 이라는 식의 표현을 종종 접하지만 그런 것이 정말로 있는지 나는 의심하곤 한다. 예술이 어떤 직관을 감정적, 혹은 감각적으로 ― 어떤 직접성으로써 ― 전하는 것이라면, 다른 시대 혹은 다른 문화에서 온 것은 ‘그런 것도 있구나’ 하는 식으로 번안되어 ― 매개되어 ― 읽힘으로써 이 정의를 벗어나곤 한다.
이미륵1의 「무던이」2를 읽었다. 1952년에 발표된, 아마도 그보다 몇 년 앞서 쓰인 소설이다. 무던히의 옛 표기와 무던이라는 이름 중 어느 쪽일까 했는데 후자였다. 무던이라는 한 여성의 혼인을 전후한 이야기를 담은 단편이다. 망명 작가였던 저자의 형편에 따라 독일어로 쓰여졌고, 후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니까, 수십 년 전의 독일인들을 위해 쓰인 한국문학인 셈이다. 한국, 아니 조선의 어떤 삶을 독일인들에게 내어 보인 작품이다.
이런 특성상 이 작품은 종종 설명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이 내외라는 묘한 말은 「남녀간에 간격을 두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처녀들이나 또 삼십 이전의 부인들은 외간남자와 가까이 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외간남자들이 들어 올 수 없는 안채에만 머물렀으며 다만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지간에만 서로 부인네들을 볼 수 있었고 또 그들과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만약 어느 여인이 외간남자와 가까이 있어서 몸을 피한다면 사람들은 이 이 여인을 「내외」를 한다고 말하였다.
자기네 문화권을 위해 쓰인 것이 다른 문화권에서 번역된 경우라면 주석으로 달릴 만한 말이 본문에 들어가 앉은 것이다. 다른 시대나 다른 문화에서 온 많은 것들이 이런 식의 주석을 요한다. 설명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라고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역시 예술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물론 하나의 작품이 온전한 사료가 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문학적 표현이랄 만한 것은 여전히 남아, 작품으로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의 문장이나 구로서, 혹은 단어로서, 어떤 감각을 전하곤 하니 말이다.
「너를 보면 부끄러워져。」
「도대체 왜?」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부끄러운듯 땅을 내려다 보았다。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할 때의 찬바람이라든가,
무던이는 어머니에게 두 팔을 올려 놓고、 어머니는 딸을 품 속으로 끌어 당겼다。
「얘야、 시집가서 신랑이 있으면 참 좋은 거란다。」
밖에서는 파도 소리가 요란했다。
할 때의 파도 소리라든가가 그러하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인을 두고도 어른들의 중신에 따라 낯 모르는 이와 결혼을 하고, 나름대로 적응을 하지마는 그러나 정인을 잊지 못하고, 그러다 결국 파혼을 당하고 목숨을 버리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며 나는 어떤 삶을 경험하기 보다는 관찰하게 된다. 이것을 예술 감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당시의 독일인들이 이 작품을 접하면서는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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