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독후감: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은 몇 가지 점에서 섣부르다. 첫째는 내가 ‘이자혜 사건’에 대해 말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둘째는 내가 이 책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읽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셋째는 이 책이 겨냥한 독자는 내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말해야 한다고 느꼈기에 쓰기로 했다. 이 글은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양효실 외 지음, 현실문화, 2017)에 대한 ― 서평이 아니라 ― 독후감이다. 나는 이 책에서 박수연의 글을 제외한 여덟 편의 글과 서문, 편집자 노트를 읽었다.

(편집자나 저자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자혜에 대한 탄원서다. 그의 무죄를 강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에 대해 내려진 ‘여론’(아마도 ‘트위터 여론’)의 유죄 판결이 너무 급했음을(성급까지는 아니더라도), 설사 그가 유죄라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절판하는 조치는 잘못 되었음을, 이자혜는 뛰어난 작가임을 ― 적어도 『미지의 세계』는 뛰어난 작품임을, 이 책은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여러 측면에서 이자혜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는 탄원서다.

그런 탄원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건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고,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하나 마뜩잖은 점은, 이 책의 몇 군데에서, 여론의 판단은 생각이 짧았던 것으로 혹은 지나치게 급했던 것으로 비판하며 스스로를 중립적인 태도로 포장한다는 인상이 들었다는 점이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들었건 이것은 판단 대 판단의 대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다.

또 하나 마뜩잖았던 점은 이 책의 부제다. “페미니즘이 이자혜 사건에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여기서 “페미니즘”이 어느 지형의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알기 어렵다. 내가 아는 한 페미니스트들은, 그러니까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들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지언정 말하지 못한 것 ― 특히나 생각지 못해 말하지 못한 것이 있지는 않았다. 이 책이 겨냥한 것은 아마도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들, 그러니까 적어도 한국에서 가장 급진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소위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일 것이므로, 어쩌면 큰 문제는 아니지만.

들어가며

나는 여러가지 점에서 이 책의 저자인 ‘우리’에 속하지는 않는다. “여자나 퀴어라 불리는”(19) 존재가 아니기 때문도, 이 글을 쓰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나눌 수 없는 차이 때문에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소통이나 의견의 일치나 동일한 이해에 이르지는 못했다”(20)고 자평하지만, 아마도 그들 사이의 차이보다는 뭉뚱그려진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양효실처럼 “이자혜를 아는 사람”이나 “더욱이 어른”, “그녀에게 필요한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23)이 아니다. 이나라나 이춘식처럼 이자혜의 작업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읽어낸 사람도 아니다. (나는 그의 단편 몇 편을 읽어 보았고 『미지의 세계』에 등장한 이미지 몇 점을 보았으며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호평을 읽었지만 그에게 흥미를 가지지는 않았다.) 미지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던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비판하는 트위터 페미니스트에 속하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에 감동을 느낀 사람도 아니며, “○○계 내 성폭력” 고발 운동에 동참했던 사람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지만 말이다. ‘우리’에 속하지도 않고 ‘우리’가 비판하는 사람들에 속하지도 않는 나는 아마도 이 책의 좋은 독자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무언가 쓰는 것은, 내가 ‘조용히’ 지켜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적절한 때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의 위치

이 책의 저자들과 내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은 아마도 (사실상 양자택일에 가까운 사건에 대한 판단이 갈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작가’와 ‘작품’의 위치에 관한 생각에 있어서이다. “‘작품’인 〈미지의 세계〉의 이야기가 왜 자꾸 ‘사건’을 설명하는 데 끼어드는지도 모르겠다”는 박연아의 말(129)이 보여주듯, 이 책의 저자들은 대개 작품을 일상세계와는 별개의 존재론을 갖는 무언가로 여기는 것 같다. 이나라는 “〈미지의 세계〉는 이자혜에게 결코 속한 적이 없다”고 쓰며(169) 이춘식은 “수용자로서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것에 대해(235) 이야기한다. 이연숙은 “창장자가 이런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창작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인간에게서 창작된 작품 자체가 어떤 이유로도 폐기되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113).

몇 개의 층위가 얽혀 있는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은 그 반대편 극단에 가깝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렇다. 작품은 언제나 일상세계의 일부를 이루며 그런 한에서 일정 정도 이상 작가에게 속한다. (이것은 작품의 의미를 작가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독자들은 작품과 함께 작가를 읽으며, 이것은 단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지 못하는 오류가 아니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상품인 작품은 작품의 이미지, 작가의 이미지와 함께 소비되며 작가라는 존재는 언제나 작품에 대한 독법에 있어 하나의 유의미한 길잡이가 된다.
저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어떤 입장이라기보다 하나의 현상 진술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서 논의를 진행할 수는 없어보인다. 일단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 일단의 조치에 처해진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작품’이 아니라 일상세계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가 그 자체로 범죄의 기록이건 아니건, 상품으로서의 『미지의 세계』는 언제든 폐기될 수 있다. 오염 의심을 받는 식품이 폐기될 수 있듯, 위험 물질 함유 의심을 받는 화장품이 폐기될 수 있듯 말이다.

나는 작품이 폐기되었고 창작의 권리가 몰수되었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의아함을 느낀다. 폐기된 것은 상품이고, 몰수된 것은 거래처 명단일 뿐이다. 단행본 『미지의 세계』가 강제로 회수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온라인에서 그것은 공개가 중단되었지만, 그것은 온라인이라는 플랫폼의 특성에 가깝다. 어디에서건 다시 공개될 수 있다는 특성과 맞물려 있을 어떤 특성 말이다. 상업적 플랫폼들이 순식간에 계약을 파기한 것은 ‘여성 작가’에 대한 특별한 가혹함이나 페미니즘을 팔아 이윤을 얻으려는 장삿속으로 비판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시 작가와 작품의 지위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어쩌면 이것은 이자혜라는 ‘현상’에 대한 나의 평가가 그들의 평가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작가는 많고 작품은 더더욱 많다. 그 중 하나의 상품이 사라지는 것이 무어 대단한 손실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춘식은 “평소에도 이자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쓴다(225). 내가 이자혜의 특별함을 이해한다면, 어떤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 작업만은 남겨야 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이것은 단지 수많은 평범한 상품 중 하나가 판매 중단된 사건일 뿐이다.

판단의 속도

이진실은 “여론 재판이 신속하게 진행된 것”을 언급하며 그 “가장 주된 동력은 이자혜라는 ‘되바라진’ 작가와 미지라는 비윤리적 화신의 동일시였다. 만화 속 허구의 캐릭터를 단번에 작가의 민낯으로 단정지어버린 것이다”라고 쓴다(52). 과연 그랬을까. ‘이자혜 사건’을 제외한 다른 사건들에서도 나는 비슷한 속도를 읽는다. 이것은 단지 독자들이 이자혜와 미지를 구분하지 못했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들과는 다른 판단의 속도를 갖고 있는 이들이 있기에 벌어진 일일 뿐인 것은 아닐까.

적어도 이런 사건에서, 그러니까 이렇다 할 물증이 없고 당사자의 진술이 상충하는 사건에서, 충분한 정보를 갖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이런 사건에 있어서의 판단은 언제나 성급한 일이다. 이런 사건에 있어서의 판단은 언제나 하나의 결단에 가깝다. 이 책의 저자들이 어떤 결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결단을 내린 이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을 성급했다고 몰 수는 없다. 더욱이 이자혜를 몰라서 그랬다는 평가(예컨대 이춘식, 227)는 차라리 오만에 가깝다. 사람들은 나름의 아는 바가 있었고, 나름의 정보를 수집했고, 나름의 속도로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속도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예컨대 허성원은 “법이 당사자들의 거취를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이자혜를 ‘범죄자’라고 부르면서 몇 시간 만에 직업을 잃게 하고 작업을 매장한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던 아닐까?” 하고 물으며 법을 기준으로 삼는다(208). 그러나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법이 기준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법관들이라고 해서, 혹은 검사나 변호사라고 해서, 우리가 가진 것 이상의 증거를 가지게 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적절한 수준의 조치를 그들이 내리게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최소한이지 최선이 아니다.

법이 기준이 될 수 없다면, 아마도 남는 것은 각자의 속도다. ‘피해자’ A의 고발만을 접한 채 이자혜의 해명을 읽지조차 않은 사람이라면 성급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자혜의 해명 또한 비판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절대적으로’ 성급했던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책의 속도보다 조금 빨랐던 사람들을 알 뿐이다. 이 책 또한 그다지 느리지 않았다고 나는 느낀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이진실은 이렇게 쓴다. “나는 2016년 트위터에서 급속히 첨예해진 ‘정치적 올바름’이 외연을 확장하면서 다소 교조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다고 본다. […] 문제가 된 이자혜 만화에 대한 출판사의 신속한 계약 해지, 출판 취소, 관련된 모든 콘텐츠의 삭제, 또 유명 큐레이터의 성폭력 사건이 터졌을 때 동인들이 보인 발 빠른 입장 표명과 대처는 실로 전염병에 대한 위생적 대처 방식에 가까워 보였다. 가해자라는 이름의 바이러스에 전염될까 싶어 재빨리 그 접촉면들을 차단해버리고 피해자 연대라는 무균지대로 신속하게 거처를 옮기기, 어떤 논쟁과 조사, 판단에 앞서 먼저 ‘깨끗한’ 도덕적 입지를 차지하기”(43-44).

그의 지적대로 일련의 ‘운동’은 대개 시장을 배경으로 진행되었다. “도덕적인 행위는 이제 윤리적인 소비자가 문제시된 생산물, 혹은 생산자를 시장에서 축출함으로써 실현된다”(44). 그러나 나는 이것이 “유저”, “독자”, “소비자”에게 있어서의 층위와 ‘판매자’에게 있어서의 층위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주어진 자료를 토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다시 한 번, 나는 그들이 “판단에 앞서” 행동한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그리고 소비 중단 이상의 이렇다 할 힘을 갖지 않은 “소비자”들과 아마도 주어진 것 이상의 자료를 수집할 힘이 있을, 그리고 비판적 생산물을 낼 수 있는 힘이 있을 ‘판매자’들 사이의 구분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판매자들의 대처는 그런 점에서 판단에 앞선 것이었을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은 채 행해진, 아마도 일정 부분 이상 장삿속이 반영된, 어떤 대처라는 점에서 말이다.

소비 중단 이외의 이렇다 할 행동을 할 이렇다 할 힘을 갖지 않은 소비자들, 이라고 썼다. 이는 그들이 논쟁을 할 능력이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내가 궁금한 점은 소비자인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항의행동이 불매일 때(허성원은 “이 요구”, 그러니까 “‘보지 않을 권리’, 사실상 권리라고 할 수 없는 이 보고 싶지 않다는 요구”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냥 이자혜의 작품을 자기 자신의 의지로 보지 않는 것”이라고 쓴다(209)), 그 허락된 바 이상이라 할 수 있는 ‘판매 중단’이라는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감히 판매자-자본의 권리에 침입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을 단지 어떤 도덕적 우월감(허성원의 표현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따르는 행위 자체가 [주는] 쾌락”(210))에서 나온 소비자적 행태로만 볼 수 있을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또 하나 덧붙이고 싶은 점은, 이 책의 논지에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리고 저자들은 이러한 구분 자체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교조화된’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하면서 (그런 것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은가 하는 의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의 발로로 읽어도 아무런 위험에 처하지 않는 이들을 나는 부러워한다. ‘도덕적 올바름에서 벗어나는’ 어떤 언행들로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아마도 내가 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다.

“가해자-괴물”에 대하여

사실 이 글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사설(辭說)에 가깝다. 내가 무어라도 말해야 한다고 여긴 것은 이 단락에 속할 내용들일 것이다. 내 판단을 밝혀 두어야 한다고 느꼈다. 이자혜라는 만화가의 독자는 아니었지만, 고발자 A의 독자이자 해명자 이자혜의 독자였던 사람으로서, (이제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내가 읽은 글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느꼈다. 지금이 그래야 할 때인지를 확신할 수 없어 미루었지만, 이 긴 사설을 쓴 이상, 말해야 할 것이다.

한 친구가 그랬다. 자신은 이자혜가 스스로 정말 몰랐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몰랐을 수 있다고, 그러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 그러니까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자혜의 해명문은 마뜩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형적이기도 했고 오락가락하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고발문을 접한 시점이 아니라, 그 시점에서였다. 이자혜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한 시점이 말이다. 그 죄는 고발자 A가 생각한 시점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후적으로 저지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가 괴물일까? 그 점에 있어서는 회의적이다. 페미니즘이라는 가면을 쓰고 돈과 명예를 취하며 사람들을 농락한, 뒤로는 강간을 사주한, 그런 괴물로 그를 그리는 것의 이점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일, 따라서 대처할 수 없는 일을 하나 늘리는 일일 뿐이다. 어떻게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태를 구성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에 대해 제기된 모든 고발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괴물을 단죄하기 위하여 그의 창작물을 절판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나는 앞에 썼듯 그저 상품 하나가 사라지는 것 뿐일 그런 사태에 통탄하지는 않는다. A가 그렇게 고발한 이상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대상을 특정하는 조롱일 수 있다고 (그것에 ‘2차 가해’라는 이름을 붙이건 그렇지 않건) 여기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세계’조차 아닌) 시장에서 몰아내는 것에 어떤 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역시, 상대를 제거 이상의 대응을 할 수 없는 괴물로 만드는 ― 우리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드는 일은 아닌가를 나는 의심한다.

이자혜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밝힌 양효실의 글이 이런 주제인 것은 다소 의아하지만, 그가 비르지니 데팡트의 이론을 빌어 내세우는 “성에 대한 도덕과 엄숙함, 경건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강간의 피해자 서사에 쾌락주의적 가벼움으로 맞설 것”이라는 요청(99)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흥미롭다. 다소 자극적인 이 문장은 “강간을 더 이상 강간으로 인정·수신하길 거부하는 쪽으로 질주해야 한다”는, “강간은 그저 폭력일 뿐”이라는 말의 변주일 뿐이다(98-99). 강간을 특수하고 절대적인 폭력으로 받아들이기를, 그러니까 삶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무언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때 피해자-우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또 한 번 불만을 말하자면, 양효실의 글이 아마도 트위터 상의 ‘폭로자’들을 향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에 나는 모종의 의아함을 느낀다.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대신 스스로의 언어로 공론화하기를 택하는 것 또한 어쩌면 양효실이 주장하는 방향으로의 질주는 아닐까. 물론 모두가 그런 질주였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나로서도 마뜩지 않은 태도들이 있었으므로) 반대 방향으로의 일반화 역시 곤란한 일일 것이다. 양효실의 호소가, ‘가볍게 여기고 그저 잊으라’는, 사실상 방치하라는 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나가며: “이자혜라는 극단”

습관적으로 또 불만만을 늘어 놓고 만 것이 오늘도 후회되지만, 남은 불만 몇 가지를 마저 늘어 놓기로 하자. 이 책은 이자혜 사건을 어떤 극단으로 여기고 있다. 이진실은 “이 사건은 [아마도 여-남의 구도로 재현되는] 피해자-가해자라는 구도에 균열을 내고, 그에 개입할 뿐 아니라 그 구도가 얽혀 들어가는 가장자리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이라고 쓰며(49) 양효실 역시 “이자혜는 일반적으로 가해자 남성과 피해자 여성으로 이분화되는 성폭력 문제에서 기이하게도 제 3항third term”이라며 “여성 부역자 혹은 여성 가해자라는 기이한 자리는 성폭력 문제를 사유하는 데 복잡하고 모호하고 그렇기에 생생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쓴다(66). 이자혜를 극단으로, 제 3항으로 여기는 것이 여론의 태도였는지 저자들이 태도인지는 불분명하다. 저자들의 평가대로라면 성급했던 여론은, 오히려 모호함 없이 분명히 판단하지 않았던가. 그와 착종된 것, 아무리 작더라도 어떤 씬scene 안에서 권력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저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간 이 “이자혜라는 극단”에 대해 저자들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가. 그의 작업이 어떤 가치를 갖는가와 별개로, 그를 둘러 싸고 제기된 어떤 사건에 대해 저자들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가. 이것이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점일 것이다. 양효실은 “자혜에게 사실관계를 묻지 않았듯이 A에게 무언가를 묻고 확인하는 것이 이 모임의 핵심적인 쟁점이나 관심사는 아니었다”고 술회한다(27). 그리고 대부분의 저자들은, 『미지의 세계』가 가해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있을지언정, 이자혜가 가해자인가 아닌가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순전히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읽히지는 않는 것은 내가 뒤틀려서일까.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도 하나의 입장이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 또한 하나의 판단이라면, 이 책(의 일부)은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탄원서라고 느끼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다. 어떤 사건(그 반응까지를 포함한)을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는 방관자-사유가가 아니라 영점에서부터 다시 논쟁하려는 이가 되기 위해서 오히려, 분명한 일단의 판단을 밝혀야 했다고 느낀다.

어쩌면 저자들의 바람대로, 그래서 나머지는 독자들의 몫이 된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지점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건 그러기를 거부하건, 이 탄원서를 앞에 두고 독자들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주장에 대해 자신의 새로운 판단을 세워야 할 것이다. 성급했다는 저자들의 비판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 의의가 있다면 아마도 그 점에 있을 것이다. 사건을 지나가게 두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사건을 독립적이고 무언가가 아니라 다른 사건들에 대한 판단을 위한 연습으로 되돌린다는 것, 여론의 재심을 요청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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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요즘의 ‘넷페미니즘’(이런 명명이 정당한진 모르겠지만)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으면서도 ‘○○ 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내가 왜 긍정적이었나를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도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은 제보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명인, 혹은 해당 영역 내에서 입지를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행해진 ‘폭로’들이 주로 주목을 받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폭로들에 힘 입어,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그러니까 이 책의 분석에 따르자면 어떤 보상 심리를 가진 것이 아닌, 혹은 반대로 자신의 신상을 밝히지 않은, 그러므로 직접적인 대응을 요구하지 않은, 그런 제보들이 이어졌다. 평하자면 해당 영역 내에 성폭력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알리고자 하는 데에 의의를 둔 행동들이었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보상을 받으려는 것이 아닌 것은 물론 상대를 깎아 내리려는 의도조차 갖지 않은 (나는 그런 태도가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이 운동으로서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지에 대한 의구심은 있지만.) 제보들로 이어진 시점에 그것은 ‘운동’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상처를 회복하려는 것을 넘어 해당 영역을 근본적으로, 적어도 전반적으로 바꾸려 한 시점에 말이다. 그 점을 빼고서는 이 ‘해시태그 운동’을 평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이 책의 저자들과는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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