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특히 전 지구적 남부의 민중은 상징적 지지를 넘어 풀뿌리 조직화, BDS, 남부-남부 연대 등 이스라엘의 정착자-식민 기획을 종식시킬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글은 팔레스타인을 반식민 투쟁의 오랜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몬도와이스》·초국가연구소Transnational Institute 공동 기획 연재의 첫 번째 글이다.
이 글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종학살이 최고로 무자비한 국면에 있었던 시기(2025년 6-7월)에 썼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분노와 무력감, 절망감을 느꼈다. 밤에는 계속되는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수백 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봤다. 담요나 수의에 싸인 채 집단묘에 쌓여 있는 시신들을, 총탄에 머리나 가슴을 뚫린 작은 아이들을, 팔다리를 잃었거나 피골이 상접한, 기아, 탈수, 감염으로 처참한 꼴이 된 몸들을 보았다.
팔레스타인에 깊이 마음을 쓰는 이라면 으레 그렇듯, 지난 두 해 동안 팔레스타인 민족이 제 땅에서 절멸 당하기 전에 이 인종학살을 멈출 길을 찾는 데에 골몰했다. 이 글에서 내가 이론이나 분석보다는 투쟁과 조직화 경험에 기댄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학술적 관점에서 쓰기보다는 거리와 광장에서, 정부 건물과 연단에서 ― 활동가로서 우리가 옹호활동을 벌이고 시온주의 체제가 팔레스타인에서 절멸을 밀어붙일 수 있게 하는 공모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하는 곳들에서 ― 썼다.
이 글은 아비야 얄라Abya Yala나[1] 다른 곳의 독자들이 말을 넘어 행동에 나서도록, 상징적이고 담론적인 연대에서 실효성 있는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설득하려는 시도다. 인종학살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에 관한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오직 집단적인, 구체적인, 지속적인 지구적·지역적 행동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 그저 인종학살적 식민주의의 80년 세월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실제로 종식시키는 데로,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족에 해방에 다가가도록 돕는 데로.

모호함과 모순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 대의에 대한 아비야 얄라의 복잡한 관계는 1947년에 국제연합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ited Nations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UNSCOP)에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행한 역할에서 출발한다.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영토의 절반 이상을 팔레스타인에 산 지 겨우 몇십 년밖에 안 되었으며 인구의 3/1 미만이고 토지의 6%밖에는 소유하지 않은 유럽 정착자들에게 넘겨줄 것을 권고했다. 합중국의 지휘와 시온주의의 로비에 발 맞추어, UNSCOP 위원국인 우루과이, 과테말라, 페루와 UN 일반총회 의장국 브라질은 동료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분할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2]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당시 새로 (두 해 전에 50개 남짓한 회원국으로) 결성된 국제연합의 2/3를 차지했는데, 분할에 13개국이 찬성하고[3] 6개국이 기권했다.[4] 반대한 것은 쿠바 뿐이었다.[5] 탈식민이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고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이스라엘을 인정키를 거부한 시점에, 아비야 얄라는 시온주의 식민 기획이 실현되는 데에 힘을 빌려 주었다.[6] 아르헨티나 역사학자 미겔 이바르루시아Miguel Ibarlucía의 지적대로 국제연합에서 표가 갈린 것은 당시 전 지구적 동의는 없었으며 오히려 서구 국가들이 ―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얻어 ― 일제히 반대했던 아랍세계에 강요한 것일 뿐임을 보여준다.[7]
아비야 얄라가 분할안을 지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요소가 몇 가지 있다. 한편으로, 이 나라들은 당시 한 세기 넘게 전부터 공식적으로 독립국이었으며 따라서 전 지구적 남부의 나머지 나라들만큼 탈식민에 관심이 있지 않았다.[8] 게다가 아랍 세계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사실상 아는 바가 없었다.[9] 이에 더해 나치의 공포가 뒤흔들었던 서구 세계에서 유대인기구Jewish Agency의 로비는 매우 설득력 있었다.
유럽의 잔혹하기 그지 없는 식민주의에 다섯 세기를 시달렸던 지역이 어떻게 팔레스타인에 강제된 국가의 식민적, 인종주의적 성격을 보지 못했는지 의문인 이들은 이 민족국가들이 유럽 정착자들의 후예인 현지 엘리트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식민적 성격의 권력과 지식이 계속해서 아비야 알라의 정치, 사회, 사유를 지배했다는 탈식민 분석가들의 지적을 유념해야 한다.[10] 그 나라들이 7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947년의 투표를, 그리고 이스라엘국과의 70년 묵은 긴밀한 유대를 자기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다 ― 이는 가자에서 두 해째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더더욱 시급한 일이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요소는 아비야 얄라의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와 그 특수한 성격이다.[11][12] 디아스포라는 다양하지만, 팔레스타인 이주민 대부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아비야 얄라에 왔으며 기독교도였다.[13] 그들은 정착한 나라(칠레, 온두라스, 엘 살바도르,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콜롬비아)에서 쉽게 현지 사회에 동화해 번영했고 상당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했다. 그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들어갔다는 것은[14]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칠레에서부터 안토니오 사카Antonio Saca와 나이브 부켈레Nayib Bukele의 엘살바도르까지에서 (샤피크 한달Shafik Handal 같은 혁명가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종종 ― 좌파 및 무장 투쟁과 관련되는 ― 팔레스타인 대의와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정치적 우파 정체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나크바 전에 팔레스타인을 떠난, 이스라엘 점령 치하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이민자들에게 고국과의 관계는 정치적이기보다는 정서적, 문화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디아스포라들과 마찬가지로 나중에는, 특히 팔레스타인인 삼사 세들 사이에서 정치화가 벌어졌다. 그들은 언어, 정체성, 집단적 기억의 회복을 통해, 그리고 정치적 행동, 학술 연구, 문학을 통해 자신들의 기원과 연결되고자 했다.
이 과정은 1970년대 들어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가 이끈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성공적인 외교를 행한 결과 팔레스타인 대의의 국제적 정당성이 증대된 것과도 이어져 있었다. 예컨대 칠레의 경우 팔레스타인인 삼사 세들은 현재 ― 특히 팔레스타인학생총연맹General Union of Palestine Students(UGEP)을 통해 대학생을 중심으로 ― 보이콧·투자철회·제재(BDS) 운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다른 사회 운동들과 연계시킨다. 이런 헌신은 현재의 인종학살에 맞선 투쟁을 상당히 강화했다. 하지만 칠레 연구자 세실리아 바에사Cecilia Baeza가 강조한 바 있듯, 시온주의 친이스라엘 로비를 추동하는 결속력이나 목적의식과 아비야 얄라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들 사이의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 차이는 여전히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게릴라 그룹, 독재, 권력이양의 머리 위를 맴도는 이스라엘의 유령
바에자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지난 세월 동안 팔레스타인 이슈에 대한 일관된 접근법을 취하지 않았고, 그래서 역내의 경향을 규정하려다 보면 필연적으로 단순화가 수반된다.[15] 1947년 각국의 투표는 위와 같았지만, 이후의 수십 년 동안 역내의 후임 정부들은 자국 내 아랍인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의 이해관계의 균형을 맞추는 실용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따라서, 매 위기마다, 정부 담화는 ‘양쪽 모두’에 대한 폭력을 규탄했고 국제법 준수를 요구했다 ― 이스라엘에 득이 되곤 하는 입장이다. 쿠바, 산디니스타 니카라과,[16] 볼리바르 베네수엘라[17]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관계는 집권당의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 변화에 영향을 받았지만, 국가 정책은 대개 이스라엘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분할안 투표가 있었던 1947년부터 1974년까지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정부는 냉전 체제 속에서 합중국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입장을 ― 물론 나라와 정부의 지향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 고수했다. 그러나 1950, 60년대 국제연합의 아프리카 및 아시아 신생 탈식민 국가 인정, 1961년 비동맹 운동의 탄생, 1967년 이스라엘의 아랍 영토 점령, 1973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이스라엘 지지 국가에 대한 엠바고 같은 요소들은 아비아 얄라 국가들이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팔레스타인 대의에 더 큰 지지를 표하게 만들었다. 1974년에 PLO가 국제연합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의 정당한 대표체로 받아들여지고 참관국 지위를 부여 받은 것 역시 관계 개선으로 이어졌다. 이후, 1970, 80년대에는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PLO를 인정했으며 PLO에서는 쿠바, 니카라과, 브라질, 멕시코, 페루, 칠레 등 여러 나라에서 대표사무소를 설치했다.
하지만, 해당 시기에, 심지어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은 1973년에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었는데도, 아비야 알라 국가들 ― 그 중 상당수가 현재 권위주의 독재 정부 치하에 있는 ― 은 농업 및 군사 근대화 자금 지원을 비롯한 이스라엘 협력 프로그램의 주요 수혜국이 되었다. 실제로 1970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이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요 수출품은 무기였다.[18]
물론 (가자 인종학살 동안 확인한 대로) 국가나 정부를 그 국민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으며, 그렇기에 1960, 70년대에는 정부의 입장과는 달리, 그리고 정부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와 팔레스타인 및 아랍 세계 양측 정치 게릴라 조직들의 연계를 포함해 팔레스타인과 아비야 알라 민중 간의 직접적인 연대 또한 형성되었다.[19]
이 시기에는 쿠바가 외교적, 정치적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66년에 아바나에서 열려 남부 세 대륙의 혁명 운동을 한 자리에 모은 삼대륙 대회Tricontinental Conference 등을 통해 서였는데, 이는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민중연대기구Organization of Solidarity of the Peoples of Africa, Asia and Latin America(OSPAAL)의 설립과 당시 제3세계주의의 주요 목소리였던 기관지 《삼대륙》 창간으로 이어졌다. 쿠바는 남아메리카 남부Southern Cone,[20] 콜롬비아, 중앙아메리카,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들 간의 전략적 정보·군사훈련 교환 프로그램을 주선하기도 했다.[21] 이쪽에서는 PLO가 이끄는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민족 해방,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보았다.
하지만 1970, 80년대 아비야 얄라에서 게릴라 운동이 패배한[22] 시기에 팔레스타인 무장 투쟁의 흐름 역시 끊어졌다. 1982년에 PLO가 레바논에서 튀니지로 밀려나면서였다. 그 후 PLO는 무기를 내려 놓고 외교를 택했다. 1988년에는 팔레스타인독립선언문을[역주1] 발표했고 1991년에는 마드리드 회담에 참여했으며 1993-1995년에는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다. 아비야 얄라에서는 이 시기에 생겨난 권위주의적이고 폭압적인 독재 체제들이 국가 테러리즘을 통해 투사들과 조직들을 궤멸시켰다. 조직들 간의 연결과 공통의 기억 또한 끊어버렸다.[23] 수많은 투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거나 망명하거나 정치수로 장기간 수감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 패배는 좌파의 여러 중요 부문에서 일부 지식인, 지도자, 활동가들 사이의 길고 복잡한 논쟁과 무장 투쟁에 대한 불신dicredit을 낳았다.[24]
1970년대, 80년대 동안 이스라엘은 합중국의 대리자 노릇을 하며 라틴아메리카 남부와 중앙아메리카에서 권위주의 체제들과 처형 부대들에 반란 진압 전술을 교육했다.[25] 이스라엘이 이렇게 독재정부들, 그 군대들과 전략적 동맹을 맺은 데에는 정치적 목적 뿐만 아니라 경제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1980년대 이스라엘 무기 수출의 1/3이 이 지역을 상대로 행해졌다.[26] 역사학자 헤라르도 레이브너Gerardo Leibner가 지적하듯, 이스라엘의 협조는 이 체제들에 외교적, 정치적 비호를 ― 또한 아마도 첩보를 ― 제공했다.[27]
이 독재 체제들이 노골적으로 반유대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컨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파타고니아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려는 (안디니아 계획Andinia plan이라 불리는) 음모가 있다고 믿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군의 아르헨티나 침략 계획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려고 언론인 야코보 티머만 등 유대인들을 고문한[28] 뒤로도 이스라엘은 군사정부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다.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Malvinas/Falklands War에 쓰인 무기를 공급했다.[29]
이스라엘과의 군사 연계는 콜롬비아연합자위군Colombian United Self-Defence Groups (AUCs)을 비롯한 극우 준군사조직들 ― 콜롬비아 내전 희생자 40만 명 중 45%가 이들에게 희생되었다.[30] ― 의 창설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AUCs의 최고 수장이었던 카를로스 카스타뇨Carlos Castaño는 1983년에 이스라엘에 가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31] 파라과이, 과테말라, 온두라스를 지배한 권위주의 체제들 역시 마찬가지로 1980년대부터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과 긴밀한 군사·첩보 관계를 유지했다. 2018년에 트럼프를 좇아 가장 먼저 예루살렘으로 대사관을 이전하기로 발표한 나라가 이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32]
1980년대 중엽부터 말엽까지, 아비야 얄라 민중들은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국가 테러리즘을 저지른 이들이 벌을 면하지 않도록 싸우는 데에 골몰하느라 유의미한 친팔레스타인 연대를 펼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1987년 말에 제1차 인티파다가 시작되어 점점 더 국제적 동조를 얻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타인 대의에의 관심이 되살아났다. 1988년에 알제에서 발표된 팔레스타인독립선언문은 새로이 팔레스타인 대의에 대한 지지를 끌어냈다. 당시에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국가를 인정한 것은 니카라과와 쿠바 뿐이긴 했지만, 독립 선언을 인정한 국제연합 일반총회 결의안 43/177호(1988)에 라틴아메리카에서 10개국이[33] 찬성표를 던졌다.
1980년대, 1990년대에 아비야 얄라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가 종식된 후, (쿠바와 니카라과를 제외하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정부가 ― 무기, 안보 체제, 사이버 보안 및 첩보, ‘대 테러 전투’ 및 ‘반란 진압’ 분야 보안군 훈련 등 네 가지 영역에 초점을 두고 ― 이스라엘과 군사·첩보 관계를 수립 혹은 유지했다. 이스라엘은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에서 열린 무기박람회에 참여했다. 칠레의 세바스티안 피녜라Sebastián Piñera는 안보 정책 및 왈마푸Wallmapou 즉 아라우카니아Araucanía 군사화의 일환으로 이스라엘과 피노체트를 제외한 그 어느 칠레 대통령보다도 많은 조약을 맺었다. 이와 비슷하게, 팔레스타인 단체 장벽을멈춰라Stop the Wall의 2011년 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대로, 노동자당Workers’ Party(PT) 정권 하의 브라질은 이스라엘과 10억 달러 가량의 군사 계약을 맺었다. 그 계약들의 결과는 경찰과 군대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favela[; 빈민가]들에서 어떤 장비, 어떤 방법으로 어떤 일을 벌였는지에서 볼 수 있다. 주로 젊은 흑인 인구가 큰 대가를 치렀다.[34] BDS 운동이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엠바고를 요구하고 팔레스타인 대의를 아비야 얄라 전역의 반식민, 선주민, 반인종주의, 반군사주의 투쟁과 연계하려 하는 것은 이런 연결고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슬로의 재앙 ― 다른 세계는 가능한가?
1차 인티파다라는 대규모 대중 봉기를 무너뜨린 것은 이른바 ‘오슬로 과정’이었다. 본토와 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 민족 상당수는 물론 세계 각지의 지지자들 역시 그 덫에 빠졌다. 아라파트 지도부가 오슬로 과정에 부여한 정당성을 생각하면, 대중이 그에 열광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오슬로 협정을 ‘팔레스타인의 베르사유 조약’이라 불렀던)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나 (이슬람주의부터 마르크스주의까지) 10개 팔레스타인 정당 등이 낸 다양한 비판적 목소리와 경고는 주목 받지 못했다. 소위 ‘평화 과정’은 인티파다를 가라앉히고 피억압자들을 억압자들과의 끝없고 헛된 ― 역사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한 걸 생각하면 결단코 믿을 만한 중재자는 아닌 (미합중국이라는) 제국주의 강대국이 주관하는[35] ― 협상에 옭아매려는 수작이었다.[36]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오슬로 과정은 다층적이고 비극적인 결과를 남겼다. 협정이 (아라파트 자신을 포함해) 많은 망명 팔레스타인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수 있게 했으며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lestinian Authority(PA)에 교육을 비롯한 여러 공공 문제를 자율적으로 관리할 권한을 주었다는 (따라서 점령 권력 이스라엘의 책임을 면해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국제연합에서의 외교적 노력을 진전시켰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의 자치라는 허울 뒤에 이스라엘의 지배라는 진실을 숨겼으며 이로써 이스라엘이 여러 아랍, 무슬림, 전 지구적 남부 국가들의 눈에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그리고 인정을 공고히 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37] 게다가 오슬로 과정에 따른 PA의 최우선 책무는 이스라엘에 자기네 민족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첩보를 공유하는 ― 또한 억압에 협력하는 ― 등 피점령 영토 내 이스라엘 정착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으며 여전히 그러하다.[38]
오슬로가 정치, 여론, 학계, 전 세계 연대 진영의 상당 부분에 만든 인식론적 덫 역시 마찬가지로 치명적이다. 오슬로 과정이 팔레스타인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지리라는 잘못된 믿음이라는 면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호도적인 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양측’이 ‘갈등confilct’에 대한 평화적 해법을 협상해야 한다는, 둘 사이의 권력, 책임 비대칭성을 숨기는 틀 말이다. 억압자와 피억압자 ― 이 경우에는 식민자/점령자와 피식민자/피점령자 ― 를 같은 선 상에 놓는 이러한 왜곡을 남아메리카 남부에서는 “두 악마 이론theory of the two demons”[39] 혹은 두 맞폭력two opposing violences 이론이라고 한다.
이런 허위적 틀이 세워지면서, 민족 해방 투쟁, 그리고 반식민 투쟁이라는 개념들은 잊혀지거나 주변부로 밀려났다. 동시에, 무기를 내려놓기로 한 아라파트와 [파타]당의 결정은 무장투쟁의 정당성을 없애는 결과를 낳았다. 1994년 4월에 [시온주의 극단주의자 바루크 골드슈타인이] 헤브론의 이브라히미Ibrahimi 모스크에서 라마단 기도를 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인 29명을 대량살해한 데 응수해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에서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일련의 자살 공격을 감행하면서 정당성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수 년을 이어진 이 공격은 서구에서 팔레스타인 대의의 이미지에 손상시켰다. 2001년 쌍둥이 빌딩 공격과 합중국 및 그 동맹국들이 벌인 테러에 대한 전쟁, 그리고 2차 인티파다가 이어지면서,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테러리즘’으로 악마화하기는 아주 쉬웠다.
이 같은 악마화는 여론, 주류 언론, 정치 체제에서만이 아니라 아이야 얄라 좌파를 비롯해 좌파 대부분에서도 벌어졌다. 기독교가 다수이고[40] 좌파 정당들은 세속적이며 그 어떤 종교적 표현도 신뢰하지 않는 대륙에서 이슬람주의가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다. 결국, PLO를 대변한다는 PA와 말 잘 듣는 대통령의 존재만으로도 무엇이 정당한 길인지, 누가 착한 팔레스타인인으로 또 누가 나쁜 팔레스타인인으로 여겨지는지가 고착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오늘날에는 ‘하마스의 테러리즘’을 먼저 비난하지 않고는 인종학살에 반대하는 말을 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신망을 잃거나 ‘테러리즘 지지’로 처벌 받을 위험에 처한다. 물론 그런 비난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국가 테러리즘을 비판해 본 적이라고는 없는, 팔레스타인의 저항이나 하마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클리셰를 읊는 이들이다.
오슬로의 후과는 또 있다. (라말라에 대사관을 설치한) 아비야 알라 국가들에 설치된 팔레스타인 대사관들이 친팔레스타인 연대 단체들, 정부들, 사회 전반의 주된 ― 때로는 유일한 ― 판단 기준이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정치 행위자의 등장은 경제적, 지리적 제약으로 인해 북반구에 비해 팔레스타인 활동가들과 직접 만나거나 교류할 기회가 훨씬 적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과 연대해 온 역사적 여정을 왜곡시켰다. 여기에 언어 장벽까지 더해져, PA 공식 담화 너머 팔레스타인인들의 ― 특히 젊은 세대의 ― 목소리와 관점을 들을 기회는 더더욱 줄어든다.
오슬로 협정 ― 팔레스타인 대의를 30년은 후퇴시킨 ― 서명은 소비에트 블록 해체, 냉 종식, 사회주의·혁명 유토피아의 위기라는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같은 시기에 아비야 얄라는 1990년 선거에서 니카라과 혁명이 패배하고 산디노주의의 위기가 이어지면서 촉발된 신자유주의 시대 ‘잃어버린 10년’(1990년대)을 지났다. 치아파스 사파티스타 봉기(1994)[41] 외에는, 사유화, 추출 기조의 반동세력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승승장구를 막을 수가 없어 보였다. 이 합중국 패권과 ‘역사의 종언’의 시대에, 획일적인 사고는 “신자유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인 […] 전 지구적 식민주의 […] 재식민화”를 부과했다.[42]
팔레스타인에서 21세기의 시작을 알린 것은 “2차 인티파다”였다. 대중 봉기로 시작되었으나 이스라엘군의 과도한 폭력 탓에 금세 유혈 군사 충돌로, 저항 세력의 처참한 패배로 이어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비야 얄라는 희망의 부활을 보았다. 새로운 희망의 조짐 하나는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WSF)이었다. 다보스경제포럼의 대척점으로 2001년 1월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에서 처음 열린 이 포럼은 이후 여러 대륙에서 해마다 열렸으며 ― 사파티스타 운동의 ‘여러 세계가 어우러지는 세계A world in which many worlds fit’에서 영감 받았을 ―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라는 기치를 내걸었다.[43] 포르투알레그리 WSF는 신자유주의적 획일적 사고와의 절연을 상징했으며 새로운 변혁적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대중 운동을 요청했다.[44]
WSF에서 팔레스타인 대의는 시작부터 언급되었지만 긴장이 없지는 않았다. 포럼의 원칙 헌장은 포럼을 무장 투쟁을 부정하는 비폭력적 공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2차 인티파다의 한가운데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팔레스타인의 WSF 참여는 다양했지만, 분명 많은 사회 운동이 지난 수십 년 간의 게릴라 경험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던 (갖고 있는) 아비야 얄라에서 무장 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 24 참고). 자살 공격과 쌍둥이 빌딩 공격 이후로 강화된 테러리즘 낙인이 아비야 얄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의 저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2000년대 아비야 얄라에서는 좌파, 진보, 중도로 간주되는 정부들 ―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Hugo Chávez(2000),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Luiz Inácio Lula da Silva(2003),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Néstor Kirchner(2003), 우루과이의 타바레 바스케스Tabaré Vázquez(2005),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2006), 코스타리카의 오스카르 아리아스Oscar Arias(2006),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Fernández(2007),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2007), 파라과이의 페르난도 루고Fernando Lugo(2008), 엘살바도르의 마우리시오 푸네스Mauricio Funes(2009),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José Mujica(2010),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2011) ― 이 부상했다. 이 시기에, 특히 룰라 다 시우바의 주도로, 남아메리카 정부들은 합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보다 독립적인 역내의 정치적 입장을 수립하려 했다.
이런 새로운 방침에 맞추어, 진보 정부들은 다양한 수준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에의 지지를 표명했다. 2010년대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통산 16개국이 팔레스타인국을 인정했으며[45] 일부는 라말라에 대사관이나 재외공관을 설치했다. 하지만 동시에 ‘균형 잡힌’ 입장을 유지하고자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확대했다. 예컨대 2007년에 메르코수르Mercosur 블록 국가들(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 당시 이 중 3개국이 진보 정권이었다 ― 은 이스라엘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18년이 지난 현재, 심지어 가자에서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해당 협정의 효력 정지를 요구하는 메르코수르 국가나 사회 운동은 없다.
단적인 예는 브라질이다. 노동당 정부는 팔레스타인과 외교 관계 및 경제 협력을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약 3천만 달러 규모로) 강화했지만 이스라엘 무기 수입 또한 늘렸다. 2000년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군사 기업들은 엘비트 시스템즈의 주도 하에 브라질 군경의 주요 공급처가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구매한 드론은 2010년부터 브라질 파벨라들의 군사화에 쓰였으며 2016년 축구 월드컵 기간에도 쓰였다. 동시에,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2015년에 (서안 정착자 운동의 지도자인) 다니 다얀을 브라질 대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이전 가자 공격 때도 이런 모순들이 보인다. 2009년 주물납작전Operation Cast Lead 당시 이스라엘과 단교한 것은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정부와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정부 뿐이었다. 보호경계작전Operation Protective Edge으로 불리는 잔혹하기 그지 없는 공격이 벌어졌던 2014년, 일부 라틴아메리카 정부가 유럽 국가들보다 약간은 소리 높여 이스라엘을 규탄하고 5개국(브라질, 칠레, 페루, 에콰도르, 엘살바도르)에서 텔아비브 주재 대사를 잠시 귀국시키기는 했지만, 단교를 한 나라는 없었다.
2010년대, 2020년대에는 아비야 얄라 몇몇 나라에서 보수파가 다시 수권해, 팔레스타인 대의에의 헌신을 중단하거나 후퇴시켰다.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정권기가 이 같은 역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다. 의회 ‘성경석Bible bench’에 모인 시온주의 복음주의 파벌들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은 보우소나루는 정권 기조를 합중국에 맞추고 트럼프가 예수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자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이를 추인했다 (브라질의 강력한 상업 파트너인 아랍 국가들의 압박으로 인해 대사관 이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정부 출범 첫 달에 보우소나루는 이스라엘과 공안, 방위, 과학, 기술 등에 대한 협약 여섯 개에 서명했다. 네타냐후는 2017년에 이스라엘 정부 수반 최초로 이 지역을, 마우리시오 마크리Mauricio Macri 정권 아르헨티나, 후안 마누엘 산토스Juan Manuel Santos 정권 콜롬비아,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 정권 멕시코를 방문했다. 2019년에는 처음으로 브라질을 방문했다.[46]
역설적이게도, 2020년대에는 아비야 얄라에서 BDS운동이 전개되었다. 성공적인 스포츠, 문화 보이콧 캠페인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에서) 축구선수들과 예술가들의 이스라엘 방문을 막았고, 학술 보이콧(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이스라엘 수자원 기업 메코로트 반대 캠페인(아르헨티나, 브라질),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있는 멕시코 다국적 기업 세멕스 반대 캠페인(콜롬비아, 멕시코), 이스라엘 군사 기업 엘비트, ISDS 반대 캠페인 등 다른 캠페인들도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아파르트헤이트없는공간Apartheid-Free Spaces 캠페인과 연례 이스라엘아파르트헤이트주간Israeli Apartheid Week도 전역으로 퍼졌다. BDS운동은 두 번의 행사(2017년 산티아고데칠레, 2018년 리우데자네이루)와 음악가 로저 워터스의 정치적 순회 공연을 조직하고 아비야 얄라에서의 이스라엘 군사주의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했으며 BDS 캠페인을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반인종주의, 노동, 환경, 선주민 운동과 결합시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47]
하지만 아비야 얄라의 친팔레스타인 진영은 시온주의 로비의 전진을 막거나 이 시기에 자행된 잔학 행위들, 예컨대 2010년부터 반복된 자유선단Freedom Flotillas 공격, 2015년(‘칼의 인티파다’ 당시)에 심각하게 격화된 서안 및 알쿠드스/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폭력, 가자 귀환대행진(2018-2019) 시위대에 대한 대량 살해와 불구화, 병합 발표와 아브라함 협정(2020), 2021년에 ‘단결 인티파다Unity Intifada’에[역주2] 대응해 가자에 가해진 치명적인 공격 등에 강력하게 대응하지는 못했다.
2021년부터 브첼렘, 인권감시,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여러 조직에서 연이어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보고서를 냈지만 팔레스타인 대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에 ―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데에 ― 이렇다 할 진전이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사실 ― 세계의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 아비야 얄라에서 팔레스타인 대의의 가시성과 그에 대한 관심은 2023년 10월 7일 전에는 매우 저조했다. 다시 한 번, 세계는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그들은 무기를 들어야만 혹은 이스라엘 체제에 수천 명씩 살해당해야만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다.

인종학살은 우리를 얼마나 바꾸었는가?
이스라엘의 생중계 되는 인종학살이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지금, 칠레가 군사 담당관들을 귀국시켰고 콜롬비아도 석탄 수출을 중단하긴 했지만 이스라엘과 단교한 것은 여전히 볼리비아, 콜롬비아, 니카라과, 벨리즈 뿐이다. 그 외에는 서구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선언 이상을 하지 못한 채 ‘두 국가’ 주문만 외고 있다. 그게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묘약이라도 된다는 듯이. 국제연합 회원국 145개국이 이미 팔레스타인국을 인정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이스라엘이 식민점령을 끝낼 수밖에 없게 만들,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실현할 길은 국제적 고립과 제재 뿐임을 모르는 듯하다.
그런 동시에, 2023년 10월 7일 이후로 일부 라틴아메리카 정부가 여전히 부족하기는 하지만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음은 분명하다. 니카라과, 쿠바, 콜롬비아, 멕시코, 칠레, 브라질은 남아공에서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ICJ)에 제기한 인종학살 재판에 함께했다. 뿐만 아니라 헤이그 그룹 8개국 중 절반이 아비야 얄라 국가(쿠바, 온두라스, 볼리비아, 콜롬비아)다. 진보 인터내셔널Progressive International에서 2025년 1월에 발족한 헤이그 그룹의 목적은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J(특히 2024년 7월 19일자 권고적 의견), 국제연합 일반총회(2024년 9월 18일자 A/RES/ES-10/24)에서 낸 회원국들에 이스라엘의 책임을 묻기 위해 유효한 조치를 취할 것을 주문하는 결의안들을 이행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콜롬비아는 (남아프리카와 함께) 2025년 7월 긴급장관회의Emergency Ministerial Conference on Palestine를 주재했고, 이 회의는 (아비야 얄라 5개국을 포함한)[48] 13개국이 이스라엘로의 무기 운송을 막고 이스라엘과의 모든 공공 계약을 시급히 재검토하며 보편관할권과 국제법을 지지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여섯 가치 조치를 약속한 보고타 공동 성명으로 마무리되었다. 정부 차원의 이런 변화들과 함께, 10월 7일 이후 아비야 얄라에서는 세계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대의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공감이 굉장히 커졌다. 곳곳에서 행진, 집회, 퍼포먼스, 대담, 캠페인이 열렸다.[49] 모든 나라에서, 새로운 집단, 네트워크, 기획 ― 특히 청년들이 주도하는 ― 을 통해 기존의 연대가 강화되었다.[50] 유의미한 일례로 새로운 유대인 반시온주의 단체들이 생겨난 것을 들 수 있다.[51]
팔레스타인을위한전지구페미니스트행동은 ‘아비야 얄라에서 팔레스타인까지: 여성의 저항From Abya Yala to Palestine: Feminine Resistance이라는 구호를 걸고 ― 팔레스타인 동료들의 호소에 응해 ― 인종학살과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저항을 2023년 11월 25일 세계여성폭력추방의날 집회의 중심에 두는 데에 동의한 페미니스트 조직들, 모임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들은 네트워크와 온라인 모임을 통해 연대체를 조직하고 공동 선언문을 작성했으며, 이 선언문은 각지의 대규모 행진 무도애세 낭독되었다. 이만한 수준의 협력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지만, 인종학살에 맞서고 팔레스타인을 지키는 싸움이 이제 페미니즘적, 성적 반체제 공간에까지 들어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3.8. 여성의날 집회들과 자긍심 행진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52] 실제로, 이슬람주의는 가부장적이며 동성애혐오적이라는 서사나 2023년 10월 7일에 성폭력이 무기로 쓰였다는 거짓말을 통해 페미니즘적, 성적 다양성 공간들을 포섭하려는 시온주의 프로파간다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페미니즘과 시온주의는 양립할 수 없음을, 혹은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학살을 자행, 정당화, 혹은 부정하면서 성적 반체제자들의 권리를 옹호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음을 방증했다.
풀뿌리 차원에서 이런 변곡점들이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제도권의 반응은 미미했다. 지역에 따라 대응이 다르긴 했지만, 보건, 교육, 언론 조합들은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 동료들에 대한 대량 살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느릿느릿 뒤늦게야 냈다. 이와 비슷하게, 메르코수르 블록의 노총들은 인종학살을 규탄하기는 했지만 그 대응은 제한적이어서, 정부, 기업, 제도의 공모를 끝내기 위한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협정 효력정지를 요구하지도 팔레스타인 노조들과의 연대에 나서지도 않았다. 스페인 노조 활동가 산티아고 곤잘레스 발레호Santiago González Vallejo의 지적대로, 연대 성명은 넘쳐나지만 이스라엘에 맞선 유효한 행동은 없는 것이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결집이 두 해 넘게 이어지면서, 이스라엘과 외교적, 상업적, 군사적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가 꾸준히 지지를 모으고 있다. 2025년 7월로 20주년을 맞은 BDS 운동 역시 같은 기간 동안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다. 동예루살렘과이스라엘을포함한팔레스타인피점령영토에대한UN국제독립조사위원회나 국제앰네스티, 인권감시, 브첼렘 등의 조직에서 낸 이스라엘이 인종학살을 저지르고 있다는 결론의 보고서들은 물론 ICJ와 UN 일반총회의 결의안들, (프란체스카 알바네즈Francesca Albanese 특별보고관이 이끈) UN 인권위원회 특별절차 등에 힘입어 BDS 운동의 오랜 요구가 정당성을 획득했다.
BDS 단체들은 현재 아비야 얄라 10여개국에서 다양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콜롬비아에서는 헤이그 그룹이 보고타에 모였을 때 열린 BDS 총회BDS Assembly와 BDS 운동에 함께해야 한다는 콜롬비아 사회운동 전반의 호소를 동력 삼아 타다문 안티밀리 콜렉티브가[역주3]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 브라질의 BDS 운동은 팔레스타인 대의를 국가 폭력에 맞서 싸우는 농민, 반인종주의, 파벨라주민favelado 운동과 결합시켰고, 이들은 룰라 정부에 이스라엘과의 외교적, 상업적, 군사적 단교를 압박하고 있다. 2024년에 BDS브라질 등은 정부가 이스라엘 군사기업 엘비트에서의 애트모스 2000 곡사포 구매를 취소케 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비야 얄라 학술 부문의 학문학살 대응은 고르지 않았다. 볼리비아, 칠레, 브라질, 콜롬비아, 푸에르토리코, 멕시코에서는 학생 농성단들이 대학에 이스라엘과의 공모를 끝낼 것을 요구했다. 멕시코의 팔레스타인과함께하는학자들Academicos con Palestin에서는 학술 보이콧 활동을 확대했다. 경제연구교육센터(CIDE)와 멕시코대학에서는 이스라엘 대학들과의 교류를 끊었다. 브라질에서는 캄피나스주립대학교(UNICAMP), 플루미넨세연방대학교(UFF), 세아라연방대학교(UFC), 남리우그란데연방대학교(UFRGS)가 이스라엘 대학들과의 모든 협약을 취소했다.[53] 우루과이에서는 공화국대학교(UdelaR)가 정부에서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 낸 ‘혁신처’의 폐쇄를 요구하고 그와 연관되는 모든 사업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우루과이 유일 노총에서 이를 지지했다.[54]
라틴아메리카 사회과학위원회Council of Social Sciences(CLACSO)에서는 2019년에 ‘연구와 개념적 기여를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와 팔레스타인이 다른 민족들과 공유하는 여러 형태의 저항을 더더욱 가시화’하기 위한 팔레스타인-라틴아메리카실무위원회를 구성했다. 실무위원회에서는 남부인식론 강좌를 비롯한 몇몇 CLASCO 정규 강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포함하는 데 더해 《알 자이툰Al Zeytun》지와 몇 편의 특별 보고서를 발행했다. 지난 두 해 동안 실무위원회는 역내 학술 보이콧 조직보다는 구성원 활동 정보 공유를 위한 공간으로 운영되었다. 제10차 CLACSO 총회(2025년 6월, 보고타)에서는 세 개의 주제 패널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 지구적 남부의 대의Palestine, a Global South Cause 포럼 조직을 맡았다.
최근에는, 아비야 얄라에서 글로벌 수무드 선단을 주시하기는 했지만, 경제적 제약과 지리적 거리로 인해 역내 민중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일부 국가(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만 규모 있는 대표단을 파견할 수 있었고 나머지(우루과이, 칠레, 콜롬비아)를 대표한 활동가들은 유럽에 살거나 체류 중인 이들이었다.

미결의 (시급한) 과제들
2023년 10월 6일 아비야 얄라에서 팔레스타인 대의는, 세계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으로 밀려났거나 아예 잊혀진 듯 보였다. 예컨대 나크바 70주년을 맞는 2023년 5월 15일은 사실상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가자의 감옥 담장을 무너뜨려 제국이 제안한 서아시아의 가짜 평화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무시하는 한 실현 불가능할 것임을 다시금 일깨워 준 10월 7일,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언제나 팔레스타인 저항의 요람이었던 불굴의 가자는 지금 해방 투쟁 사상 가장 많은 피가 흐르는, 그러나 아마도 결정적인, 새 장을 쓴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시온주의의 절멸 기획이 팔레스타인 민족청소라는 목표의 완수에 이만큼 가까이 다가간 적도 없기는 하지만, 백 년이 넘게 저항하는 동안 팔레스타인 대의가 아비야 얄라에서를 비롯해 이만한 ― 인종학살에 공모하는 열강에 대한 집단적 분노를 통해 두 해 넘게 지속되고 있는 ― 전 지구적 지지를 받은 적은 없었다.
세계 민중들, 특히 전 지구적 남부 민중들은 20세개의 대대적인 탈식민 과정 이전인 1945년에 만들어졌고 현재 위기에 처해 있는 전 지구적 체제의 산물인 팔레스타인 분할에 대한 ‘UN의 합의’를 넘어서는 과제에 나서야 한다. 국제법의 구조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국제법은 팔레스타인 민족, 모든 곳의 피억압 민족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도덕적, 법적 정당성의 근거로서 국제법을 옹호해야 한다. 하지만 또한, UN의 합의는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서구의 민족국가 모델을 넘어서는 것을 비롯해 보다 정의롭고 현실적이며 창의적인 선택지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속복임을 인식해야 한다.
아비야 얄라에서 이를 해내기 위해서는 ― 관련되는 당사자들과 책임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 몇 가지 과제들을 또한 해결해야 하는데, 아래에서는 그 중 일부를 개관한다.
인식론적 덫 극복하기
오슬로 패러다임은 물론 UN 결의 181호(1947)와 242호(1967)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두 민족 간의 갈등으로 본다. 하지만 역사학자 호르헤 라모스 톨로사Jorge Ramos Tolosa의 지적대로[55] 팔레스타인 문제는 점차 원주민 인구의 제거를 전제로 하는 전형적인 정착자 식민주의의 사례로 이해되고 있다. 이 점은 문제의 근원이 식민주의, 인종주의, 우월주의 이데올로기이자 민족주의 기획이 횡행했던 19세기 말 유럽에서 태어난 정치적 기획인 시온주의임을 이해하는 열쇠다.
반드시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 지난 세기의 다른 (알제리, 베트남, 앙골라, 모잠비크, 남아프리카, 그 어디든) 탈식민 혹은 해방 과정에서 영토를 분할해 한쪽 ― 큰 쪽 ― 은 식민자들에게, 다른 한 쪽은 원주민 혹은 피식민 인구에게 주자는 제안이 나온 곳이 어디 있는가? 설령 국가들은 분할 모델과 그 불공정하고 불법적인 ‘1967년 국경’을 넘어설 수 없다고 (혹은 넘어서고 싶지 않다고) 해도[56] 남부의 민중들은 팔레스타인 전체와 그 전 인구의 해방을 위해 팔레스타인 민중과 함께 싸워야 한다. 1967년에 점령당한 영토(서안, 가자, 예루살렘)에 사는 550만 명만이 아니라 또한 ‘1948년 영토’에서 아파르트헤이트 하에 사는 2백만 가까운 이들, 그리고 특히 이웃 국가 난민촌에서 혹은 해외 망명지에서 비참하게 권리 없이 사는, (이제 난민, 망명자 4세대에 적용되는) 귀환할 권리를 1948년 이래로 침해 당하고 있으며 오슬로 체제에 기반한 모든 협상에서 무시 당해 온 (전체 팔레스타인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6-7백만 명을 위해서 말이다.
이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해방 없는 팔레스타인국 인정은 허상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절대 놓쳐서는 안될 패러다임 ― 팔레스타인 탈식민화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해체, 혹은 함사 하무체네Hamza Hamouchene의 말을 빌리자면 ‘반식민 투쟁의 횃불 전달하기’ ― 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오슬로 패러다임의 극복을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대의는 민족적, 반제국주의적, 반파시즘적 해방 투쟁이며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는 (무장 투쟁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식민 지배 및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할 권리가 있음을 재확인해야,[57] 그리고 그들의 투쟁을 종종 간과되는 아이티 민중의 투쟁을 비롯한 아비야 얄라의 다른 반인종주의, 반식민주의 투쟁과 연결 지어야 한다.[58]
정규교육·민중교육에서 팔레스타인 다루기
최근에 아비야 얄라에서 부상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지식 생산 뿐만 아니라 특히 지식의 사회화, 민주화에도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시민사회와 정규교육의 층위에서 열린 새로운 공간들을 확대해야 한다. 이는 팔레스타인, 레반트, 서아시아 연구 관련 상황이 천차만별인 아비야 얄라의 대학들에도 적용된다.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사례로 아르헨티나 여러 대학에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 자유강좌cátedras libres Edward Said’를 들 수 있다.[59] 단과대학(대개 철학·문학 학부)의 아웃리치 부서에서 운영되는 이 강좌는 학술 연구·강의를 공동체 아웃리치와 결합해 교원양성센터나 사회단체들에서 대면·비대면 강의를 연다. 이들의 폭넓은 교육 경험을 활용하면 그런 전문 양성 기관이 없는 지역에서 중등교육과정 수준의 교사나 기관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변함 없는 과제는 팔레스타인 연구를 탈식민 연구, 선주민 연구, 비판적 인종주의 연구와 연결하는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UBA) 에드워드사이드석좌교수 가브리엘 시비니안Gabriel Sivinian의 말대로, 포스트식민·탈식민 연구는 ― 이 분야가 상당한 정도로 사이드의 작업에 영감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 팔레스타인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사이드는 받아들이고 팔레스타인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어딘가 좀 이상하다. 그런데도, 몇몇 탈식민 지식인들에 이에 대해 쓰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 실정이다.’[60]
바벨의 저주 끊기
지리만큼이나 언어 역시 아비야 얄라 민중을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인들과 갈라 놓고 있다. 아비야 얄라는 영어권도 아랍어권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랍 세계 바깥에서의 팔레스타인 옹호, 네트워킹 노력은 대부분 유럽, 북아메리카, 남부의 영어권에 초점을 맞추어 왔으며 (장벽을멈춰라, BDS 운동, 팔레스타인공공외교연구소Palestine Institute for Public Diplomacy 등 소수의 예외를 빼면) 아비야 얄라와의 관계 형성은 우선 순위에 두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아비야 얄라와 팔레스타인 모두에서 (북부의 재정적 지원과 함께) 언어 장벽 극복을 위한 통번역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다음에 도움이 된다.
- 온라인 혹은 대면 대화를 통해 아비야 얄라 활동가와 팔레스타인 활동가가 각자의 현실과 공동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직접적이고 유연한 대화 이어가기.[61]
- 종종 영어로 글을 쓰지만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로는 잘 번역되지 않는 젊은 세대 팔레스타인인들의 비판적, 저항적 목소리를 비롯해,[62] 영어·아랍어로 풍부하게 나와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고급 정보나 분석 자료에[63] 아비야 얄라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하기.
- 북부의 중재 없이 남부-남부 연대를 건설할 수 있도록, 연대 지식, 실천, 경험, 성찰의 진정한 교환과 상호학습을 가능케 하는 연대 네크워크 및 전 지구적 상호 연결망 건설의 지평 확대하기.[64]
(팔레스타인) 땅에 단단히 발 딛기
직접 경험으로 얻은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대한 지식, 팔레스타인 민족을 그들의 땅에서 만나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물론 아비야 얄라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다녀오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목적에 쓸 보조금이나 자체 재원이 없으며, 활동가들은 ― 북반구와 달리 ― 대개 전적으로 자원봉사로 일하며 고용 불안정을 겪고/거나 여러 일자리에서 동시에 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65]
그러므로, 아비야 얄라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다녀올 집단적이고 연대에 기반한 방법들을 찾을 필요가 있다. 쿠바, 니카라과, 치아파스 등지에 연대단을 보내 사탕수수, 커피, 오렌지 수확을 돕거나 군사화로 위협 받는 공동체들에 국제적 지지를 제공한 오랜 전통이 있으므로 이 역시 가능할 것이다. 이런 연대단들은 해마다 세계 각지에서 팔레스타인을 찾아 올리브 수확을 돕는 연대 활동가들과 비슷하다 ― 올리브 수확철은 가족들, 공동체들의 생계 유지에 매우 중요한, 따라서 이스라엘 정착자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폭력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에 이용하는 시기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 브라질의 무토지노동자운동Landless Workers’ Movement(MST)이나 땅의친구들Friends of the Earth 사례처럼, 대표단을 파견해 올리브 나무 심기, 올리브 수확하기 등 팔레스타인 공동체들의 자조 활동 배우기
- (국제 동반자,[역주4] 연대 프로그램의 지원 하에) 이스라엘 병사·정착자 폭력에 위협 받는 공동체들에 장기 체류하기.
- 작가 레지던시, 문화·학술·인권 기관 인턴십, 피해 공동체 기술 지원, 난민촌 자원 활동 등 다양한 양식의 교류, 상호 학습
팔레스타인 정치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지식 심화하기
팔레스타인의 대표성과 정당성이 전에 없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66] 지금, 아비야 얄라에서 연대 활동에 관여하는 이들이 PA 대사관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정치적 행위자들과 관계를 확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현재의 역학은 물론 팔레스타인 정치, 그 다양한 시기들, 행위자들, 입장들 ―특히 오슬로와 PA 탄생 전후의 ― 의 역사도 반드시 배워야 한다.[67] 팔레스타인 사회 곳곳에서 수행되는 여론 조사를 분석해 (지방 선거를 제외하면) 20년째 선거가 열리지 않은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정치적 선호와 각 행위자들의 정당성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팔레스타인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들 ― 좌파 정당들, 노조들, 인권 단체들, 농촌 조직들, 페미니스트들, 환경주의자들, 퀴어들, 언론인들, 예술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특히) 청년들 등 종종 전통적인 조직들에 소속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정치를 펼치는 ― 에도 다가가야 한다.
팔레스타인 땅의 ‘신성함’ 인정하기
반종교적 선입견의 극복을 제안하고자 부러 도발적인 제목을 붙였다. 무신론적 좌파 진영에 상당히 팽배한 이 선입견은 팔레스타인 민족 대부분에게 뿌리 박혀 있는 영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종교에 근거한 분쟁으로 오인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알 쿠드스[역주5] 옛 도심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세 개의 유일신교에서 신경하게 여기는 땅의 주관적 측면이 갖는 무게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람 알-샤리프Haram al-Sharif [역주6] 단지가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갖는 강력한 상징적 의미를 ― 그곳에의 침범은 인티파다와 미사일 발사를 촉발한다 ―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종교적 차원을 고려하는 것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득세하고 있는 ― 알 아크사 모스크의 폐허 위에 제3성전을[역주7] 지으려 하는 ― 광신적 정착자 운동과 그들이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가장 ‘성스러운’ 지역, 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라는 성경 속 이름으로 부르는 서안을 빼앗으려 하는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시온주의 기획이 종교를 팔레스타인 정복, 병합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팔레스타인 민족의 일상에, 세계관에, 회복력에, 투쟁 이면의 동기에, 끝내 승리하리라는 확신에, 종교적 차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집을 철거 당하고 올리브 과수원을 파괴 당하고 가축들을 도륙 당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사형 당하거나 수감 당하는 일을 아무리 많이 겪어도, 어디서 저항할 힘을 얻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손을 들고 위를 보며 ‘신에게서’라고 답한다.
믿음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끈질긴 희망의, 그리고 수무드 정신의 원천이다. 번역하기 아주 어려운 말인 수무드는 그들의 오랜 인내와 한 세기를 이어진 시온주의에의 저항을 설명해준다. 이 내면의 강인함을 이해하지 않고는 가자에서의 지난 스물여섯 달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홋삼 샤바트Hossam Shabat, 아나스 알-샤리프Anas Al-Sharif 등 살해 당한 언론인들의 증언이 보여주듯, 이 믿음은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순교가 해방의 씨앗이 되리라고 확신케 하는 내적인 힘이다.[68]
팔레스타인 투쟁의 종교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으려 하는 데에는 종종 이슬람혐오와 함께 가는, 이슬람 저항에 대한 선입견도 함의되어 있다. 지난 두 해 동안 이 사안은 서구 좌파를 분열시키며 뜨거운 논쟁을 촉발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은 그들을 근본적으로 가르는 것은 세속/종교도 좌/우도, 보수/진보도 아닌 저항과 부역이라는[69], 팔레스타인에서는 민족주의자든 마르크스주의자든 이슬람주의자든 저항하는 이를 지지한다는[70] 팔레스타인 지식인들의 말을 듣지 못하게 만든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저작이나 출판물 대부분에 종교적 차원이 빠져 있는 것은 아비야 얄라에서의 팔레스타인 대의에 또 한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 문화가 지배적인 이곳에서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일원인 선주민 기독교인,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를 거의 알지 못하는데, 그들은 한 세기를 이어진 시온주의에 대한 저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며 또한 다수인 무슬림과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71] 이런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시온주의 선전가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다. 이스라엘이 폭력적인 이슬람에 맞서 서구 유대-기독교 문명을 수호하고 있다는 시온주의 서사를 뒤집기 때문, 침묵하고 이스라엘에 공모하는 서구 교회들이 맹렬한 비판을 받게 하기 때문, 기독교 시온주의가 땅과 원주민족이라는 두 개의 해석적 열쇳말에 기반한 탈식민·해방 신학으로써 맞서야 할 ‘제국의 신학’임을 폭로하기 때문이다.[72]
BDS 운동 끌어안기
BDS 운동 공동창립자 오마르 바르구티Omar Barghouti는 2017년에 마드리드에서 어느 활동가 모임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상징적 연대를 하기에는, 우리는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8년이 지난 ― 그 중 두 해는 강도 높은 인종학살이 벌어졌다 ― 지금, 효과적인 연대를 향한 질적 도약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 오직 보이콧, 투자철회, 제재, 그리고 국제적 고립만이 이스라엘이 현상 유지의 대가를 감당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전선에서 BDS 캠페인을 수행하고 역내에서나 국제적으로나 전선들을 연결해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압박을 가해야 한다.
이런 길을 택한다는 것은 거짓된 ‘평화 절차’ 패러다임을 영원히 묻어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과 협상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 조건에서는 불가능하다. 단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엄청난 불균형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이 협상에 불성실하게 임하고 팔레스타인 협상단을 살해하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 들고 스스로 서명한 협상조차 지키지 않은 오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73] 저 ‘유대 국가’는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이스라엘의 땅) 그 어디에도 팔레스타인 국가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현 파시스트 정권이 미래에 보다 중도적인 정권으로 대체된다 한들, 겉보기만 달라질 뿐일 것이다.[74] 바로 그렇기에, 남아프리카 민중이 간 길을 좇아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 ― 대대적인 제재와 국제적 압력, 고립이 남아프리카를 파리아pariah 국가로 만들지 않았다면, 인종주의 정권은 넬슨 만델라 석방과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에서 안드레사 올리비에라 소아레스Andressa Oliveira Soares가 팔레스타인 연대를 위해 내린 처방은 아비야 얄라 전역에 적용된다. ‘전진을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교차적 조직화, 노동조합, 학생운동, 환경 및 영토보호[역주8] 단체들과의 지속적인 협력, 꾸준한 정부 압박, 역내 협력 강화, 이스라엘 프로파간다를 해체시킬 공교육 전략이 필요하다.’[75]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대의는 지금 ‘국제 공동체’가 또 한 번 배신한 ― 합중국과 이스라엘에서 고안한 제국-식민적 가자 계획을 UN에서 승인한 ― 데 따른, 가장 불확실한 국면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건대, 팔레스타인 민족은 자신들의 해방과 자결권은 갈수록 정당성을 잃어가는 타락한 국제 체제에서 나오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한 바 있다. 오히려 그들은, 정의, 이성, 역사가 자신들의 편임을, 시온주의 기획에는 미래가 없음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난 두 해 동안 그들은 전 세계 민중들이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분석이나 예측도 온전할 수 없다. 팔레스타인 민족이 한 세기가 넘도록 식민적, 인종학살적 시온주의 기획에 저항하며 입증한 어마어마한 도덕적, 영적 저력은 말할 것도 없다. 반복되는 배신에도 꺾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불굴의 정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들의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혹은 허물어진 그들의 집들 사이에서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함께 웃고 그들과 함께 마라미야maramiya(세이지) 차를 마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저항하고 결코 백기를 들거나 항복하지 않을 민족임을 ―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은 희망을 잃는 사치를 부릴 처지가 아님을. 그들이 우리에게서, 전 세계 민중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들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젊은 팔레스타인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카삼 무아디Qassam Muaddi(언론인·작가, 라말라) ― ‘이것이 어떻게 끝날지는 세계의 나머지에 달렸다. 서구 열강은 언제까지 이 시온주의 식민 기획을 고수할 것인가 그들은 언제까지 이 세게에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리는 없다고 우길 것인가? 팔레스타인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언제 자유로워지느냐만이 문제일 뿐이다. […] 그 또한 이미 모든 것을 쏟아부은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의 나머지에 달렸다. […] 거리에서 보여진 의식awareness이 진짜이기를, 세계 민중들이 오슬로에 속았던 것처럼 또 한 번 속지는 않기를 바란다. 사방에서 솟구친 연대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를, 인종학살이 촉발한 변화가 멈추기 않기를 바란다. 팔레스타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해서.’[76]
이스라 만수르Israa Mansour(작가·학생, 가자) ― ‘우리는 이 땅의 아들딸이다. 우리는 저항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숙명임을 배웠다. […] 가자에서 희망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하루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이다. 이 땅이, 그 모든 파괴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다시 한 번 번성하리라고 믿는 일이다. 폭격기가 물러가고 폭음은 그저 우리가 손주들에게 저항의 역사를 들려 줄 때 저 멀리서 떠올릴 기억이 되리라고 믿는 일이다. […] 집 한 채 빠짐 없이 모두 허물어진대도 가자는 남을 것이다. 우리 가슴에, 우리 피에, 우리가 쓴 한 마디 한 마디에. 우리의 운명은 패배가 아니다. 인간의 힘, 전쟁보다도 강한 힘을 증언하는 영원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글을 마치지만, 잊지 마시라 ―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77]
주
↥1 얄라yalla는 아랍어에서 ‘가자’, ‘얼른’, ‘서둘러’ 같은 말을 할 때 쓰이는 일상 어휘로, 모든 방언에서 쓰인다. 아비야 얄라Abya Yala는 파나마, 콜롬비아 선주민인 쿠나Kuna족에서 나온 말로 ‘생명의 피의 땅’이라는 뜻이며 선주민 공동체들과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그 동맹들이 남북 아메리카를 가리켜 쓴다.
↥2 Sabini Fernández, L. (2022) ONU 1947: Uruguay en el origen de Israel. Montevideo: Ediciones I Libri. See also: Ramos Tolosa, J. (2012) ‘El primer fracaso de la ONU en Palestina: el “plan de partición”, Pablo de Azcárate y la Comisión de Palestina’. Universitat de València. https://dialnet.unirioja.es/servlet/articulo?codigo=4721952
↥3 볼리비아, 브라질, 코스타리카, 도미니카 공화국, 에콰도르, 과테말라, 아이티, 니카라과,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4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멕시코.
↥5 1949년 5월에 17개 라틴아메리카 국가는 이스라엘을 국제연합 정회원국으로 승인하는 UN 일반총회 결의안 273호에 찬성했다. 1950년 초까지 모두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Baeza, C. (2012) ‘América Latina y la cuestión palestina (194–-2012)’. Araucaria. Revista Iberoamericana de Filosofía, Política y Humanidades 14(28): 111–131.
↥6 Munck, R. and Pozzi, P. (2019) ‘Israel, Palestine, and Latin America: Conflictual Relationships (Introduction)’. Latin American Perspectives 46(3): 4–12.
↥7 Ibarlucía, M. (2017) Israel, Estado de conquista (2nd. expanded edition). Buenos Aires: Editorial Canaán, p. 29.
↥8 세실리아 바에사에 따르면 1995년 반둥 회의에 참여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는 없었으며 1961년 비동맹 운동 창립에 참여한 것은 쿠바 뿐이었다. Baeza, C. (2017). ‘Latin America’s turn to the right: implications for Palestine’, 13 January. https://www.opendemocracy.net/en/north-africa-west-asia/latin-america-s-turn-to-right-implications-for-palestine/
↥9 쿠바 대표 에르네스토 디히고Ernesto Dihigo는 예외였는데, 그는 발푸르 선언에서 대영제국은 시온주의 운동에 제 것이 아닌 영토를 주었으며 분할안은 UN 헌장이 천명한 자기결정권에 반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표를 던졌다. Wadi, R. (2021) ‘Latin America, the 1947 UN Partition Plan, and decolonization’, 29 November. https://mondoweiss.net/2021/11/latin-america-the-1947-un-partition-plan-and-decolonization/
↥10 아니발 키하노Aníbal Quijano, 왈터 미뇰로Walter Mignolo, 마리아 루고네스María Lugones, 엔리케 두셀Enrique Dussell 등. 예로 다음을 보라. Castro-Gómez, S. and Grosfoguel, R. (2007) El giro decolonial. Reflexiones para una diversidad epistémica más allá del capitalismo global_._ Bogotá: Siglo del Hombre Editores. http://observatorioedhemfoc.hospedagemdesites.ws/observatorio/wp-content/uploads/2020/09/El-giro-decolonial-1.pdf
↥11 세실리아 바에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유대인 인구와 대략 맞먹는 수로, 주로 칠레(약 40만 명)와 온두라스(12만 명)에 있다.
↥12 클라우디아 카롤리나 곤살레스 카브레라Claudia Karolina González Cabrera의 학위 논문 「1948-2020년간 라틴아메리카 팔레스타인 난민·이주민에 대한 문헌 고찰Migrantes palestinos en América Latina. 1948-2020. Una revisión bibliográfica에 이 주제에 관한 문헌 목록이 실려 있다.
↥13 그들은 오스만 치하 대시리아에서 건너 온 시리아-레바논 이주 물결의 일부를 형성했다. 1차 세계 대전 발칸 전쟁에서의 오스만튀르키예 패전, 강제 징집 등이 더해진 몰락하는 제국의 정치적 불안은, 특히 기독교도 아르메니아인 인종학살 이후로, 민족적·종교적 소수자들을 위험에 몰아 넣었다. 또 하나의 붕괴 요소는 영토 분할을 조장하고 기만적, 모순적 신의를 약속하면서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몰래 자기들끼리 대시리아 영토를 나누어 가진 식민 열강(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이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러시아 제국과 이탈리아의 동의 하에 대영제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갖기로 한 협정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정권에서 공개했다. 팔레스타인을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지정한 1920년 산레모 회의의 결정은 이 협정을 계승한 것이다.]
↥14 [라말라에 있는 기독교인 거주 지역인] 타이베Taybeh 출신의 한 팔레스타인 청년은 과테말라시에 사는 친척을 방문했다가 그들의 집이 이스라엘 보안 회사의 경비를 받는 것을 보고 받은 충격을 들려주었다. 마야인 인종학살을 저지른 독재자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ín Ríos Montt를 무장시키고 자문하고 훈련시킨 것이 이스라엘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이러니하다. Lowenstein, L. (2023) The Palestine Laboratory: How Israel Exports the Technology of Occupation Around the World. Verso. Cited in Claramunt, F. (2025) ‘Gaza, un genocidio de exportación, 30 May. https://brecha.com.uy/gaza-un-genocidio-de-exportacion/ 참고. 이스라엘과 과테말라의 긴밀한 관계는 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진보적인 현 베르나르도 아레발로Bernardo Arévalo(1947년에 대통령이었던 후한 호세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의 아들이다) 정권까지 이어지고 있다.
↥15 Baeza, C. (2012) Op. cit.
↥16 니카라과의 역사적 입장은 이스라엘이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Anastasio Somoza Debayle 독재 정권을, 이어서 혁명적인 산디니스타 정부 전복을 위해 싸웠던 콘트라 반군Contras을 지원한 것을 통해 설명된다. 소모사 데바일레의 아버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는 나크바(1948년 팔레스타인 민족 청소)를 저지를 시온주의 군사 조직들에 훈련과 재정을 제공했다. 한편, PLO에서는 1969년부터 산디니스타 게릴라에 군사 지원을 제공했으며 이는 10년 후 그들이 승리할 때까지 이어졌다.
↥17 1999년, 차기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에서 볼리바르 혁명을 일으켰으며, 여기에는 맹렬한 반제국주의와 팔레스타인 대의에의 강고한 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후임인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도 이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이 글이 나온 후인 2026년 1월 3일, 미합중국 트럼프 정부는 베네수엘라를 공습해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납치했다. 현재 합중국에서 마약 밀매 등의 혐의로 그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18 Munck, R. and Pozzi, P. (2019) Op. cit.
↥19 이 시기에 나온 주요 저작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 혁명La revolución palestina』에는 아르헨티나의 언론인, 작가, 투사였던 로돌포 월시Rodolfo Walsh가 알제리,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에 다녀온 후 1974년에 (게릴라 단체 몬토네로스Montoneros와 연계된) 신문 《노티시아스Noticias》에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다. 시온주의 식민 기획의 담론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이 선구적인 글은 현재까지도 적실하다.
↥20 레바논과 시리아에서의 PLO와 (아비야 얄라 최대의 조직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 게릴라 몬테네로스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는 예컨대 다음을 보라. Robledo, P. (2018). Montoneros y Palestina. De la revolución a la dictadura. Buenos Aires: Planeta.
↥21 Organización Libertas (2025) ‘La Guerra Fría y las Guerrillas en América Latina’, Montevideo: Serie del Archivo a la Conciencia 3. https://libertas.uy/libertas/8734/ 참고.
↥22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남아메리카 남부(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의 민-군 독재정부들은 1959년 쿠바 혁명 승리 이후에 생겨난 게릴라 운동들을 (1960년대 브라질에서 했던 것처럼) 무너뜨렸다. 비슷한 패배의 결과로(페루) 혹은 협상과 평화 협정을 통해(엘살바도르, 과테말라) 1990년대에는 아비야 얄라에서 무장투쟁이 사실상 사라졌다. 콜롬비아의 역사는 보다 복잡한데, 여러 게릴라 단체가 전쟁, 협상, 평화협정, 재무장을 오가며 긴 시간 활동했다. Prieto Rozos, A. (2018). ‘Guerrillas contemporáneas en América Latina’. Mexico: UNAM. https://conceptos.sociales.unam.mx/conceptos_final/649trabajo.pdf 참고. 또한 Marchesi, A. (2019). Hacer la revolución. Guerrillas latinoamericanas, de los años sesenta a la caída del Muro. Buenos Aires: Siglo XXI Editores Argentina 참고.
↥역주1 마흐무드 다르위시, 조지훈·박기형 옮김, 〈팔레스타인 국가 독립 선언문: 1988년 11월 15일〉,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웹진 《인-무브》, 2024.05.12.
↥23 아랍이 이스라엘에 군사적으로 패배하고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가 사망하고(1970) 그가 설파했던 범아랍의 꿈이 끝을 맞은 등 다른 요소들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4 이 논쟁을 둘러싼 주장과 근거를 여기서 모두 다루기는 불가능하다. 비판가들은 주로 초점주의적foquista 게릴라 모델, 전위주의, 분파주의, 교조주의, 군대주의militarism에 주목하지만, 혁명 조직들을 억압 세력의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 그들 간의 분쟁과 균열이 팽배했던 데에도 주목한다. 무장 조직들 ― 특히 남아메리카 남부의 ― 이 좌파 및 대중 조직들의 주요 대표 분파들을 결집시킬 노련한 동맹 형성 정책이 없었던 탓에 자신들의 대의에 대대적인 지지를 모으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Prieto Rozos, A. (2018). Op. cit. 및 Marchesi, A. (2019). Op. cit.을 보라.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이 같은 실패의 예로 콜롬비아를 들 수 있다. 콜롬비아에서는 대부분의 선주민, 농민 운동들이 스스로가 ‘모든 무장 행위자들’과 별개라고 선언했으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영토에 대한 방어, 통제에 대한 분쟁으로 그들에게 희생되기까지 했다.
↥25 Shahak, I. (2007) El Estado de Israel armó las dictaduras en América Latina. Buenos Aires: Editorial Canaán. See also: IJAN (2012) ‘El papel de Israel en la represión mundial’.https://www.ijan.org/wp-content/uploads/2015/03/israel-wwr-la-rebellion-version.pdf. 보다 최근 시기에 대해서는 2018년에 라틴아메리카 BDS 운동에서 작성한 보고서 《이스라엘 군사주의와 라틴아메리카El militarismo israelí en América Latina》를 보라.
↥26 Munck, R. and Pozzi, P. (2019) Op. cit.
↥27 냉전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의 독재정권과 협력한 것은 반란 진압, 반테러, 실존적 위협에 대한 전쟁이라는 관점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Leibner, G. (2025). La colaboración de Israel con la última dictadura militar argentina: Nuevas fuentes y reinterpretación’.Historia y Política. https://recyt.fecyt.es/index.php/Hyp/article/view/102126. 또한 다음을 보라. Leibner, G. (2023). ‘The political partnership between Israel and authoritarian Uruguay, 1972-1980’. Cold War History 25(2): 171–196. https://doi.org/10.1080/14682745.2024.2331200
↥28 Timerman, J. (1981) Preso sin nombre, celda sin número. New York: Alfred A. Knopf.
↥29 McEvoy, J. (2025) ‘How Israel secretly armed Argentina during the Falklands war’, 2 April. https://www.declassifieduk.org/how-israel-secretly-armed-argentina-during-the-falklands-war/
↥30 Comisión de la Verdad (Colombia) (2022) ‘Cifras de la Comisión de la Verdad presentadas junto con el Informe Final.’ https://web.comisiondelaverdad.co/actualidad/noticias/principales-cifras-comision-de-la-verdad-informe-final
↥31 Colombia Informa (2023) ‘Israel y Colombia: Negocios, armas y paramilitarismo’. Editora Bogotá. https://www.colombiainforma.info/israel-y-colombia-negocios-armas-y-paramilitarismo/
↥32 Baeza, C. (2018) ‘Why did Latin America stop standing up for Palestine?’, 9 June. https://www.aljazeera.com/opinions/2018/6/9/why-did-latin-america-stop-standing-up-for-palestine
↥33 아르헨티나, 불리비아, 브라질, 콜롬비아, 쿠바, 에콰도르, 멕시코, 니카라과, 파나마, 페루.
↥34 BDS 운동에서 규탄한 바 있듯, 2025년 10월 28일에 알레망Alemão과 페냐Penha 파벨라에서 대량 살해를 저지른 리우데자네이루 특수경찰작전대대Special Police Ops Battalion(BOPE)는 이스라엘 무기제조사들로부터 장비와 훈련을 제공 받았다.
↥35 Khalidi, R. (2020) The hundred years’ war on Palestine. A history of settler colonial conquest and resistance. London: Profile Books. pp. 185–194.
↥36 Abdel Razek, I. (2021) ‘Thirty years on: The ruse of the Middle East Peace Process’, 31 October. https://al-shabaka.org/briefs/thirty-years-on-the-ruse-of-the-middle-east-peace-process/
↥37 1991년, 쿠바를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시온주의를 인종주의의 하나로 규정한 UN 일반총회 결의 3379호(1975)의 철회에 찬성했다. 이스라엘이 오슬로 과정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해당 결의한 철회를 요구한 데 따른 투표였다.
↥38 스페인어 자료가 부족한 탓에 아비야 얄라에는 PA와 그 대통령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의 궤적이 거의 안 알려져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압바스의 임기는 2009년에 끝났다. 2006년에 치러진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입법부) 선거에서 하마스가 승리했다. 2007년에 압바스는 [당시 하마스 수장] 이스마일 하니예Ismail Haniyeh의 통합 정부 제안을 거부하고 (이스라엘과 서구의 지원 하에) 하마스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서안과 가자의 정치적 균열로 이어졌다. 그는 또한 입법 위원회를 해체하고 이후로 정부령政府令으로 통치하고 있으며, 이슬람주의 정당들의 PLO 가입 지원이나 (최근에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있었던 [팔레스타인 제 단체의 대표자 회의 같은]) 민족을 다시 한 번 단결시키려는 노력은 물론 PA와 PLO가 함께한 선거 실시 시도까지도 방해해 왔다. 그의 정부는 부패와 권위주의로 특징지어지며 반대파나 저항 세력 인사들을 투옥하고 심지어 살해하기까지 한다. Scahill, J. (2025) ‘Trump, Gaza, and Oslo Déjà Vu’, 1 December. https://www.dropsitenews.com/p/trump-gaza-abbas-oslo-hamas-palestinian-islamic-jihad-fatah-palestinian-liberation-organization-palestinian-resistance-united-nation-macron-france
↥39 사회 변화를 위해 싸우는 게릴라 운동의 폭력과 현상태를 수호하는 독저정권의 국가 테러리즘을 동치하는 것이다.
↥40 기독교 전반에 이슬람혐오가 있긴 하지만, 가장 강력한 곳은 시온주의 복음주의다. 이들의 세계관은 라틴아메리카 전역(그리고 전 지구적 남부 전체)에, 특히 소득 및 교육 수준이 낮은 사회 영역에 퍼지고 있다.
↥41 이 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사파타주의의등대Al Faro Zapatista에서 묶은 책들을 보라.
↥42 González Casanova, P. (1996) ‘Globalidad, neoliberalismo y democracia’. In P. González Casanova and J. Saxe-Fernández (Eds.) El mundo actual: situación y alternativas (p. 47). Mexico: UNAM, CEIICH/Siglo Veintiuno Editores.
↥43 Mignolo, W. (2007) ‘El pensamiento decolonial: desprendimiento y apertura. Un manifiesto’. In S. Castro-Gómez and R. Grosfoguel (Eds.) El giro decolonial. Reflexiones para una diversidad epistémica más allá del capitalismo global_._ Bogotá: Siglo del Hombre Editores. http://observatorioedhemfoc.hospedagemdesites.ws/observatorio/wp-content/uploads/2020/09/El-giro-decolonial-1.pdf
↥44 Calvo Rufanges, J. (2008) ‘El Foro Social Mundial: nuevas formas de hacer política’. Cuadernos Deusto de Derechos Humanos 51. https://www.corteidh.or.cr/tablas/25643.pdf
↥45 니카라과는 1979년에 이미 팔레스타인국을 인정했으며 1988년에는 쿠바가, 2008년에는 코스타리카가, 2009에는 베네수엘라가 인정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는 2010년 말에 인정했으며 2011년에는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칠레, 기아나, 수리남, 페루, 온두라스, 엘살바도르가 뒤를 이었다. 과테말라는 2013년에, 멕시코와 콜롬비아는 훨씬 늦게 2024년에 팔레스타인국을 인정했다. 아직인 국가는 파나마 뿐이다.
↥46 1947년부터 현재까지의 브라질-이스라엘 관계와 브라질에서의 팔레스타인 연대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분석으로는 Oliveira Soares, A. (2025) ‘From the Favelas and Rural Brazil to Gaza. How militarism and greenwashing shape relations, resistance, and solidarity with Palestine in Brazil’, 5 November. https://www.tni.org/en/article/from-the-favelas-and-rural-brazil-to-gaza를 보라.
↥47 Landi, M. (2017) ‘De México a Palestina, conectando las luchas por un mundo sin muros’, 25 June. https://desinformemonos.org/mexico-palestina-conectando-las-luchas-mundo-sin-muros/
↥역주2 이스라엘, 가자, 서안 전역의 팔레스타인인이 동참한 대규모 인티파다로, 그해 5월에 동예루살렘 셰이크 자라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퇴거 명령에 반발해 벌인 항의 시위가 시발점이 되었다.
↥48 볼리비아, 콜롬비아, 쿠바, 니카라과,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인도네시아,이라크, 리비아, 말레이시아, 나미비아, 오만, 남아프리카, 튀르키예
↥49 2025년 8월 3일, 사파티스타운동에서는 ‘우리 모두는 팔레스타인의 자식이다’라는 구호를 걸고 팔레스타인 민족에의 연대를 선언하며 치아파스에서 세계저항세력대회를 열었다.
↥50 칠레에서는 팔레스타인을지지하는연대자들Coordinadora por Palestina에서 BDS 칠레에서 점령과아파르트헤이트에반대하는유대인반시온주의자들Judíxs Antisionistas contra la Ocupación y el Apartheid에 이르는 여러 세대의 조직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우루과이의 팔레스타인지지연대체Coordinación por Palestina에는 노동조합, 학생조합, 협동조합, 연대단체, 인권단체 등이 속해 있다.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멕시코 등에도 여러 세대가 모인 비슷한 연합체들이 있다. 남부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는 마푸체족 투쟁이 팔레스타인 대의에 동질감을 가져 왔다. 전사 모이라 밀란weychafe Moira Millán이 팔레스타인 여성에게 쓴 서신은 여러 형식, 언어로 널리 퍼졌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현지 공동체 영토와 공유지를 옹호하는 정치적 환경주의 단체들이 [이스라엘 국영 수자원 기업] 메코로트 퇴출Fuera Mekorot 운동을 다시 활성화했다.
↥51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우루과이의 예로 다음 단체들을 들 수 있다. Judíxs Antisionistas contra la Ocupación y el Apartheid (칠레), Judíes x Palestina (아르헨티나), Judíes por una Palestina Libre, Agrupación Mexicana de Judíes Interdependientes(멕시코), Vozes Judaicas por Libertação (브라질), Judíxs contra el Genocidio(우루과이). 이들 모두 팔레스타인을지지하는전세계유대인들Global Jews for Palestine과 협력한다.
↥52 예컨대 우루과이에서는 2025년 다양성 행진과 최종 성명에서 인종학살과 팔레스타인 LGBTQI+ 공동체의 투쟁이 강조되었으며 가자의 퀴어들이 보낸 메시지가 낭독되었다. 2024년에는 에콰도르, 우루과이 활동가들이 핑크워싱 웨비나를 조직해 아르헨티나, 브라질, 팔레스타인의 젊은 LGBTQI+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 주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젊은 조직으로는 팔레스타인을지지하는트랜스페미니스트연대 ‘수박’Sandía: Coordinadora Transfeminista por Palestine이 있다.
↥역주3 타다문Tadamun은 아랍어로 연대를 뜻하며 안티밀리Antimili는 반군사주의antimilitarist를 줄인 말이다.
↥53 Oliveira Soares, A. (2025) Op. cit.
↥54 예루살렘 혁신처 폐쇄 캠페인은 우루과이 BDS 단체 아파르트헤이트없는공간Espacios Libres de Apartheid에서 시작했다. 이 압박의 결과로 정부는 운영을 잠정 중단했지만, 단체에서는 계속해서 영구 폐쇄를 요구하고 있다.
↥55 Ramos Tolosa, J. (2022)Palestina desde las Epistemologías del Sur. Buenos Aires: CES, Universidad de Coimbra, and CLACSO. https://www.clacso.org/wp-content/uploads/2022/07/Palestina-desde-las-epistemologias.pdf
↥56 UN에서 인정하는 이스라엘 국경은 1947년 분할안(UN일반총회 결의 181호)에서 설정한 선이 아니라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을 끝낸 1949년 휴전선이다. UN헌장은 정복 전쟁으로 얻은 영토를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78%를 차지했다. Ibarlucía, M., op. cit.
↥57 3103호(1973), 37/43호(1982) 등 여러 UN 일반총회 결의에서 정당성을 인정 받았다.
↥58 이런 선상에서, [프랑스의 법학자·반인종주의 활동가] 미레유 파농Mireille Fanon은 2024년 11월에 몬테비데오에서 아프리카계 우루과이인 공동체, 학계과 일련의 만남을 갖고 〈신식민주의, 인종학살, 아파르트헤이트: 하이티와 팔레스타인의 사례〉 대담을 진행했다.
↥59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 에드워드 사이드 자유강좌는 2008년에 개설되었다. 코마우에국립대학교(네우켄), 파타고니아산후안보스코국립대학교, 마르델플라타국립대학교에 연계 강좌가 있다.
↥60 Landi, M. (2023) ‘Con Gabriel Sivinian, de la Cátedra de Estudios Palestinos Edward Said de la UBA: Contra el memoricidio’. Semanario Brecha (Montevideo). https://brecha.com.uy/contra-el-memoricidio/
↥61 우리는 각자의 반식민, 반인종주의, 반가부장제, 반군사주의 투쟁에 관한, 국가 테러리즘과 인종화된 몸들에 마구잡이로 총을 쏘고 정치수를 장기 수감하고 활동가를 납치하고 고문과 성폭력을 전쟁 무기로 쓰고 토지 수탈과 강제 추방을 일삼는 데에 맞선, 영토와 공유지를 지키기 위한, 국가 테러리즘을 겪는 개개인, 공동체들에 대한 심리적 지원에 관한, 성폭력과 동성애혐오에 맞선 페미니스트, 퀴어 투쟁에 관한 (또한 다른 많은 것에 관한) 팔레스타인 활동가들과 아비야 얄라 활동가들의 교류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62 예로 《새 아랍The New Arab》 필진이나 하라36.팔레스타인이야기Hara 36. La Palestine narrée, 우리는숫자가아니다We are not numbers 같은 기획에 참여하는 수많은 젊은 목소리들, 《일렉트로닉 인티파다》, 《몬도와이스》, 《+972 매거진》 등에 인종학살을 증언하는 글을 싣는 가자 사람들 등이 있다. 아비야 얄라 독자들을 위해 번역된 주목할 만한 예외로는 2024년에 샤디 로하나Shadi Rohana가 아랍어 글을 편역해 멕시코 경제문화기금Fondo de Cultura Económica에서 출간한 『단전에 맞서: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가자에서 온 목소리들Contra el apagón. Voces de Gaza durante el genocidio이 있다.
↥63 예로 자달리야Jadaliyya, 알 샤바카Al Shabaka 같은 싱크탱크, 《알 자지라》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페이퍼The Palestine Papers》, 《더 로비The Lobby》, 《10월 7일October 7》, 《가자: 공격 당하는 의사들Gaza: Doctors under attack》, 《가자: 포화 아래의 언론인들Gaza: Journalists under fire》 등) 여러 언론에서 내는 탐사 기록 등이 있다. 언어 장벽은 최근의 가자 법정Gaza Tribunal이나 제1차유대인반시온주의자총회First Jewish Anti-Zionist Congress 같은 행사도 보이지 않게 만든다.
↥64 이런 교류의 훌륭한 예로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이 사파티스타 작은학교Escuelita Zapatista ― 『치아파스에서의 나크바La Nakba en Chiapas라는 증언집을 낸 ― 참여가 있다. 또 하나의 고무적인 일로 팔레스타인 작가 아말 에케이크Amal Eqeiq의 경험이 있는데, 그녀는 치아파스에 머물면서 담장, 벽화, 선주민 투쟁을 통해 멕시코와 팔레스타인의 닮은 점을 찾았다. 하지만 이런 팔레스타인인들은 대부분 아비야 얄라 여행이 비교적 쉬운 합중국에 살고 있음을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65 이런 현실은 아비야 얄라 내 이스라엘 프로파간다 산업의 대대적인 자원 투자와 대비된다. ‘중동 유일 민주정’의 ‘문명화되고 계몽된’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정치·사회 지도자, 입법가, 사업가, 노조 활동가, 언론인, 과학·문화·체육 분야 인사를 포섭하기 위해 유급으로 이스라엘에 초청하는 데에 많은 자원이 투여된다.
↥역주4 해외 방문자나 활동가가 현지 활동가, 지역 주민 등과 동행함으로써 군인, 식민 정착자 등이 쉽사리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활동.
↥66 UN 안보리 결의 2803호(2025년 11월 17일)를 PA에서는 수용한 데 반해 팔레스타인 시민사회는 물론 거의 대부분의 정치 세력, 분파들이 이를 거부한 것은 PA와 팔레스타인 민중 사이의 골이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67 Scahill, J., op. cit.
↥역주5 이스라엘이나 영어권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곳의 아랍어 명칭.
↥역주6 ‘고귀한 성소’라는 뜻으로, 알 쿠드스 옛 도심에 있는 이슬람교 성지다. 바위돔과 알 아크사 모스크가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성지이며, 성전산으로 불린다. 2000년 9월에 이스라엘 리쿠드당 당수 아리엘 샤론이 이곳을 방문한 것이 제2차 인티파다의 계기가 되었다. 2021년 단결 인티파다 시기에는 라마단을 맞아 알 아크사 모스크에 모인 시위대를 이스라엘 경찰이 폭력 진압했고, 하마스에서는 경찰의 철수를 요구했다가 응하지 않자 미사일을 발사했다.
↥역주7 바빌론에 파괴된 성전과 로마에 파괴된 성전을 계승하는 성전.
↥68 인종학살 첫 달에 살해 당한 가자의 시인 히바 아부 나다Hiba Abu Nada는 이를 ‘순교자들의 빛’이라 불렀다. 아비야 얄라의 해방신학이 반 세기 전에 가르쳐 준 것과 같은 확신이다.
↥69 Abdeljawad, O. (2024) ‘The question of Hamas and the Left, 31 May. https://mondoweiss.net/2024/05/the-question-of-hamas-and-the-left/
↥70 Hroub, K. (2024) ‘Conversation with Dr. Khaled Hroub’. In H. Cobban and R. Khouri (Eds.) Understanding Hamas. And why that matters. New York: OR Books. 또한 흐루브가 이 주제를 논하는 영상을 참고하라.
↥71 남아프리카 교회들이 1985년에 서구 교회들에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한 지지를 요청했던 데에서 영감을 얻어, 2009년에 한 공의회 단체에서 베들레헴에 〈카이로스 팔레스타인Kairos Palestine〉이라는 문서를 배포했다. 식민 점령, 아파르트헤이트, 인종학살을 규탄하고 BDS를 지지하며 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전 세계 기독교인과 기독교 공동체들이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문서였다. 이를 주도한 이들 중 하나는 신학자 문테르 이삭Munther Isaac으로, 그의 선지자적 메시지 『폐허 속의 예수Christ Among the Rubble』는 지난 두 해 동안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72 예로 다음을 보라. Theologies of Liberation in Palestine-Israel: Indigenous, Contextual and Postcolonial Perspectives(2014), edited by Nur Masalha and Lisa Isherwood.
↥73 게다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는 2024년 7월 19일자 권고적 의견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결권은 협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이스라엘에는 불법 식민 정착자 점령 체제를 해체할 의무가, 다른 나라들에는 그에 협력하지 않고 그 종식을 위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74 이츠학 라빈Yitzhak Rabin, 시몬 페레츠Shimon Peretz, 혹은 에후드 바라크Ehud Barak 같은 노동 지도자들이 ‘두 국가 해법’을 이야기할 때 생각하는 것은 약간의 자율성은 있지만 진정한 주권을 비롯해 독립 국가에 따르는 다른 속성들은 없는, 기껏해야 반투스탄에 가까운 자그마한 팔레스타인 ‘국가’임은 잘 알려져 있다.
↥역주8 defense-of-territory. 선주민 공동체의 영토와 자원, 생태계를 지키고 그에 대한 법적 권리를 확립하기 위한 활동.
↥75 Oliveira Soares, A. (2025) Op. cit.
↥76 Landi, M. (2025) ‘Con Inès Abdel Razek y Qassam Muaddi: En las consecuencias del genocidio se está dibujando otro orden mundial’, 30 October. https://brecha.com.uy/razek_muaddi/
↥77 Mansour, I. (2025) Gaza resiste. Un sufrimiento inolvidable. Montevideo: Alter Ediciones (published in collaboration with four solidarity coll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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