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틀과 벽지와 장판이 깨끗한 집

창틀과 벽지와 장판이 깨끗한 집, 은 아마도 처음이다. 벽지나 장판을 새로 한지 얼마 안 된 집에 들어간 적은 있었던 것도 같지만 창틀은 늘 낡은 것이었다. 오래 전 여섯 살 때쯤 새로 지어 이사 간 집은 모든 것이 깨끗했겠지만 기억 속에 없으므로, 이것은 나의 처음이다. 이사 갈 집을 정하고 계약금을 보냈다. 집주인은 오늘 밤에 귀국한다고 한다. 연락은 중개인을 통해 그의 딸과 했다. 어쩌면 집주인 모르게 입금한 돈이다.
15만 원. 2005년 대학 기숙사를 나와 처음 살았던 방의 월세다. 세 개의 방에 각각 낯모르는 이들이 살고 거실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곳이었다. 낡은 집의 2층이었던 그곳은, 수도관이 상해 1층으로 물이 새기 시작하며 철거가 결정되었다. 쫓겨나듯 방을 나와 새로 정착한 곳은 월세 15만 원이었던가, 20만 원이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몇 개의 방들을 전전하며 살았고 집을, 그러니까 방과 부엌과 화장실을 홀로 갖게 된 것은 2008년이 처음이었다. 옥탑이었던 그 집의 월세는 32만 원이었다. 그 집에는 오래 살지 못했다.
그 후로는 친구네 원룸에서 같이 산 적도 있고 가족들과 함께 투룸에 산 적도 있다. 바퀴벌레가 들끓던 옥탑과 집주인이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반지하에도 살았다. 다행히 내 화장실을 갖고서 살았지만, 누군가를 가벼운 마음으로 청할 만한 집들은 못 되었다. 조금은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좁은 방과 낮은 천장, 낡은 창과 퀴퀴한 냄새, 그런 것들과 같이 지내는 것은 괴롭지는 않아도 산뜻한 일은 아니다. 익숙해졌지만, 좋아할 순 없었다.
최근에 내부 수리를 끝낸 방이라고 했다. 플라스틱 창틀도, 벽지도, 싱크대 문짝도 하얬다. 방바닥은 아마 나뭇결무늬의 비닐 장판이었던 것 같다. 볕이 썩 잘 들지는 않지만 1.5층 정도는 되었다. 나는 공간 감각이 없으므로, 지금 살고 있는 집과 비교해 더 넓은지 어떤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욱여넣는다면, 쌓인 책들과 옷가지들이 어떻게든 들어갈 것은 같았다.
월세는 30만 원이다. 수도, 전기, 가스요금을 더하고 지금껏 없이 살았던 인터넷 사용에 드는 비용까지를 합하면 적어도 월 35만 원은 들 것이다. 굶어죽지 않는 데에만, 이라고 하면 조금 과장이 섞이지만 굶어 죽지 않고 몇몇 친구들과의 끈을 유지하는 데 ― 그들과 전화를 하고 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데에만, 이라고 하면 조금의 과장도 없다. 딱 그까지에만도, 월 백만 원은 넘게 들더라. 지지난해까지는 돈이 드는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고, 한 달에 60만 원에서 80만 원 정도를 썼다. 지난해에 여윳돈이 좀 생겨 기록하지 않고 살았더니 늘어난 생활비가 한 달 백만 원 가량이다.
창이 열리지 않는 방도 보았고 무허가 건물도 보았다. 화장실 문이 없는 집도 있었고 신발 둘 곳이 없는 집도 있었다. 그런 집들을 돌며 나는 조금씩 작아졌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가난한 편도 아니므로 그리 괴롭지야 한지만,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 괴롭지야 않지만, 이따금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몸 누일 곳 구하기야 어렵지 않지만, 책을 꽂아둘 곳, 친구들을 청할 수 있는 곳을 구하기는 아직은 어려운 일이다. 언제쯤 어렵지 않은 일이 될는지, 기약은 없다.
내일은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내 삶의 큰 부분을 쥐게 될 집주인의 면면을 처음 확인하는 날이다. 좋은 사람이길 비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집주인이 살지 않는 집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깐깐한 사람이라면 내 생활을 감시하려 들 것이다. 피할 길은 딱히 없을 것이다. 얹혀 살았던 친구네 한 곳을 빼고는 늘 집주인과 같은 건물에 살았다. 줄곧 주인집, 이라고 불러 왔었는데, 언젠가부터 집주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들을 적처럼 느끼기 시작하면서였던 것 같다.
내 손으로 복비를 내고 들어가는 집은 처음이다. 누군가와 함께 살았던 집, 그래서 그들이 중개비를 냈던 집들을 제하면 모두가 동네를 돌며 전봇대에 붙은 전한지를 보고 구한 곳들이었다. 계약서를 쓰지 않은 곳도 있었고 계약서는 쓰되 계약 기간을 쓰지 않은 곳도 있었다. 기껏해야 한두 달 월세밖에 안 되는 보증금을 걸어 두고 있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돌려받지 못하면 곤란한 금액의 보증금을 내고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사갈 집에서는 아직 공사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사까지 스무 날 정도가 남았으니, 그 즈음이면 괜찮아 질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새 집의 냄새를 맡으며 한 동안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조금씩 짐을 싸야 한다. 피곤한 일이다.

아주머니와 아기주머니

간만에 ‘아주머니’가 ‘아기주머니’에서 온 말이라고 성토하는 글을 봤다. ‘아재비’나 ‘아저씨’라는 말의 뿌리를 함께 설명하지 못하는 이것은 물론 민간어원설에 불과하다. ‘아주머니’는 ‘앚’과 ‘어미’가 결합된 데서 비롯된 말으로, 요즘 말로는 ‘작은어머니’ 정도에 해당한다. 어미뻘 되는, 어미는 아닌 사람. (‘아저씨’는 ‘아재비’, 그러니까 ‘앚’과 ‘아비’가 결합한 것에서 온 말이다.)
이런 어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위의 민간어원설을 진짜로 받아들이고 분개하는 이들이 있다. 이 분개를 조롱하는 이들은 사전을 들이밀며 너는 틀렸노라고, 너의 분노는 그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웃곤 한다.
그러나 민간어원설은 이유 없이 받아들여지고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어떤 신념체계를 정당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에 유통되고, 때로 그것은 어떤 현실에 직접적으로 부합하는 듯 보이기에 채택된다. ‘아주머니’를 둘러싼 분개는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실제 어원이야 어떻건, 이미 ‘아주머니’는 ‘아기주머니’와 다른 뜻이 아니게 되었기에, 저런 어원설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주머니’의 어원이 실은 ‘앚+어미’라는 사실보다는, 그것을 ‘아기주머니’로 믿게 만드는 ― 다시 말해 정말로 그들을 아기주머니 취급하는 어떤 현실에 더 관심이 있다.

‘선택’ 너머의 익숙한 고민들 ― 영화 〈24주〉와 〈가타카〉가 던지는 재/생산에 관한 질문들

들어가며
가끔 쳇바퀴를 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에서 현행법상 낙태는 불법이므로, 낙태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공식적인 담론의 장에 진입하지 못한다. 낙태에 관한 공식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므로, 낙태를 처벌하는 현행법을개정하는 논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다. 낙태가 죄로 남아 있기에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므로 낙태는 죄로 남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낙태죄 폐지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요즘의 분위기는 고무적인 일이다.지난해 폴란드의 시위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도 열린 “검은 시위” 등이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끎으로써 공식적인 담론이라 할 만한 것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시기를 우리는 맞고 있다.검은 시위의 주요 구호 중 하나는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말이었다. 여성의 신체적, 성적 자기결정권을강조하는 이 말은 (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일견 이론의 여지 없이 명백해 보이는 이말은 어쩌면 위험을 안고 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해묵은, 그리고 허구적인 양자 대립 구도를 반복할 위험 ― 다시 말하자면 임신과 출산 혹은 낙태 (그리고 양육) 과정에 수반되는 수많은 요소들을 간과하게만들 위험 말이다.물론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는 일시적인 전략일 뿐일 수도 있다. 임신 및 그 이후의 과정들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을 논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일 수도 있다. 아니, 그 이후에야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의 자기결정권만을 생각할 때에도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는 시작일 뿐 궁극적인 목표일 수 없다 ― 법 개정 이후에도여전히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드는 사회와 싸워야 할 것이므로 ― 는 점에서 그 고민들을 마냥 미루어 둘 수는 없을것이다. 나는 믿는다.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을 쟁취할 수조차 없다.특별히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목에 쓴 대로 그것은 “익숙한 고민들”이다. 다만, 최소한의 자기결정권마저 보장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고민의 뒤켠으로 밀려나 있는, 그래서 종종 잊혀지곤 하는,그런 고민이다. 영영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기에 간단히나마 기록해 두려는 것이 이 글의 작은 목표다. 추상적인 고민은 어려운 것이므로, 누군가가 상상한 어떤 ‘미래들’을 고민의 단초로 삼으려 한다. 영화 〈24주〉와 〈가타카〉가 그리는 미래들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들을, 조금이나마 ― 대개는 장애에 관해 ― 살펴 보려한다.

[후략]

  •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의제행동센터 2017년 상반기 특강 “영화로 얘기해보는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 정치”에서 했(어야 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이다.
  • 전문: https://www.dropbox.com/s/lrapyzt74cgaamb

또 지고 돌아왔다

몇 번인가, 매주 촛불집회에 나갔다. 오랜 시간을 있지는 않았다. 모여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연만 보고 발언만 듣는 집회는 익숙하지 않다. 그런 집회엔 안 간지 꽤 되었지만, 내게 익숙한 집회는 조직된 사람들이 함께 작전을 짜서 움직이는 집회다. 그 작전이란 때론 경찰 저지선을 뚫고 어딘가를 점거하는 것이고 때론 행인들을 상대로 유인물을 돌리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 위한 것도 아닌 집회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많다는 건 역시 위협이 되는 모양이다. 경찰과 충돌하지도 통제선을 넘지도 않는 백만 명이 위협이 되었던 모양이다 — 물론 그 와중에 피를 흘리며 싸운 전봉준투쟁단 같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 위협에, 국회가 움직였다. 박근혜가 탄핵소추되었다. 직무가 정지되었고, 이제 헌법재판소에서 무언가 판단을 내릴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국민이 승리했다고.
백남기 씨는 결국 운명했고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는 광화문 앞을 밟지 못했지만, 새벽의 광화문에서 또 누군가 무력진압을 당했지만, 광화문에서 열린 혹은 서울을 제외한 각 지역에서 함께 열린 집회들만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무언가를 잃지는 않았다 — 많은 이들이 체력과 시간과 돈을 썼지만, 그걸 ‘잃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잃지 않고 무언가 얻어 보기는 오랜만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이다.
그럼에도 이겼다는, 승리했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백만 명이 넘는 이들이 모여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국회의, 혹은 대통령의 결단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드디어 그 결단을 끌어냈지만,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헌재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여전히 모든 것이 간접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의민주제라는 체제 하에서 이는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주제라는 형식을 깨지 않는 한, 백만이 아니라 천만이 모여도 청와대에 들어가 박근혜를 거리로 끌고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직접민주제를 채택하지 않는 한, 국회의 결단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기분이 찝찝한 것은, 지금의 대의민주제가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이 불가능하다는 점, 이것만으로도 지금의 대의민주제 하에서는 언제든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 또 한 명의 대통령이 비리를 저질렀을 때, 국민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국회를, 그 때에도 보수적일 국회를 압박하는 것 뿐일 테니 말이다. 그것을 바꾸지 않는 한, 이겼다는 기분은 들지 않을 것 같다.
또 있다. <수취인분명>이라는 노래로 여성혐오를 표출했던 DJ doc는 결국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메인 무대가 아니라고는 해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모 단체가 주관하는 무대인 모양이다.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허점투성이, 아니 거짓말투성이 민주주의는 여전히 굳건하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 한, 이겼다는 기분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사람들은 말한다. 국민이 승리했다고. 국민의 명령을 국회가 받든 것이라고. 반만 사실이다. 정권이 말하는 국민에 노동자가 없었듯, 지금 승리를 만끽하는 이들이 말하는 국민에는 여성이, 성소수자가, 청소년이, 없다. 절반의 국민만이, 혹은 그보다 적은 국민만이 승리했다. 국민에 끼지 못한 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누군가가 시민대표자회의 같은 것을 추진하는 모양이다. 거론되는 대표자들은 하나 같이 ‘중진’이다. 정말로 중년 남성인 경우가 많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학벌이든 무엇이든 든든한 것 하나쯤은 가진 이들이 더러 있다. 그 든든한 무언가가 지금껏의 활동으로 쌓은 지지도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그저 다른 무언가로 명성을 가진, 이 일에 관해서는 해낸 바 없는 이들이다.
그런 식으로, 가진 것 없는 이들, 힘 없는 이들은 또 한 번 밀려난다. 그래서 나는, 승리를 즐길 수가 없다. 늘 이런 식으로 씁쓸하게 무언가를 마무리하고 싶진 않지만, 씁쓸한 맛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겼다는 기분이 들 때까지, 게으르게나마 무엇이라도 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