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나누어 갖기: 신미경, 그리고 퍼포먼스로서의 조각

신미경 개인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서울: 아르코미술관, 2018.7.5-9.9.)은 작가가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 온 비누 조각 작품들을 전시한다. 신전 쯤 되어 보이는 건축물은 미완의 것이거나 폐허이다. 흉상들은 닳아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다. 중국풍의 항아리들만은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시장을 가득 메운 비누 향기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이것 역시 사라져 가는 중이라는 것을.
영원성은 흔히 이야기되는 예술의 속성 중 하나이다. 사용하지 않으므로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물리적인 의미에서도, 미는 불변의 것으로서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정신적인 의미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이 영원성을 믿기에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만지지 않아도 작품은 닳는다. 미라는 범주만은 사라지지 않을지언정, 시간에 따라 미의 이상은 변화한다.
신미경의 작품은 이제는 누구나가 아는,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의심하는 ― 여전히 사람들은 저 영원성을 믿으므로 ― 이 사실을 새삼 반복해 말한다. 공들인 보존처리에도 불구하고 사라질 것이 분명한 재료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은 관객들에게 자신을 만지라고, 그리 함으로써 자신을 사라지게 하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도슨트들은 작품에 손을 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신미경의 〈화장실 프로젝트〉는 비누 조각상을 화장실에 비치해 방문객들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졌다.)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이라는 말은 그렇다면 공허하거나 난해하다. 이 조각상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천연색으로 칠해졌던 고대 그리스의 신전과 조각상이 이제는 순백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 역시 언제나 왜곡되고 변형된다는 사실? 그러한 왜곡과 변형에도 불구하고 좋은 예술이란 끊임 없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사실? 흔하고 쉬운 깨달음이지만, 저 조각상들은 끝내는 빈 공간만을 남겨 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싶어진다.
조각, 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퍼포먼스다. 전시되는 것은 그저 완성된 조각상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라져 가는 과정 자체다. 아무리 느릴지라도 말이다. 공연이 끝나는 순간, 그러니까 관객의 시야에서 작품이 사라지는 순간이 어떤 공연이 완성되는 순간이듯, 이 조각상들 역시 소멸하는 순간이 그 완성의 순간일 것이다. 퍼지는 비누 향기, 미끌거리는 비누의 감촉, 문지를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볼륨, 이런 것들과 마찬가지로, 조각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희미한 흔적, 혹은 빈 자리 그 자체의 인상 같은 것들까지가 이 작업에서 관객이 얻어갈 감각이 될 것이다.
언젠가 내가 이야기했듯 공연 예술이 완성되는 것은 결국 관객에게서라고 한다면, 이 비누 조각들이 풍화되는 과정에서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마 작가로서의 조각가 자신의 자리일 것이다. 작품들이 사라지므로 그의 업적이 함께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다. 조각상을 닳아 없애는 관객의 손길, 혹은 바람과 비 같은 것들과 작가의 자리를 나누어 가진다는 말, 절대자로서의 작가라는 허상의 자리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이라는 말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작품이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불멸의 기억도, 작품의 강렬한 아우라도 아니다. 작품이 사라진 후에 남는 것은 그저 그 작품이 있었던 자리, 이제는 텅 비어 버린 공간이다. 작가와 관객과 비와 바람이 나누어 가졌던 자리, 그리고 앞으로도 줄곧 나누어 가질 ― 함께 존재할 그 자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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