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형의 마네킹들과 아카이브로서의 몸

정금형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평범하게 물건을 수집하고 그걸 재조합하는 걸 즐기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1 퍼포먼스 영상이라든가를 기대하고 방문한 정금형 개인전 《스파 & 뷰티 서울》(서울: 송은아트스페이스, 2018.03.09.-05.26.)은 이런저런 오브제며 영상이며만을 내어 놓고 있었다. 굳이 와서 볼 것은 없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 진행되었던 퍼포먼스를 제외하면, 《스파 & 뷰티 서울》 작가가 수집한 피부 관리용품과 수염 관련 제품들, 그에 관한 영상들, 그리고 그것들을 마네킹들과 조합한 몇 개의 오브제들로 구성된다. 손톱이나 발가락을 씻는 솔들, 분장용 수염들, 체모의 자리에 솔이나 샤워타월이 박혀 있는 마네킹들, 그런 것들로 구성된 전시라는 뜻이다. 그런 것들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사람이라면 (나의 동행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놀라움이나마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사물들로부터 이렇다 할 감흥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하다못해 신체의 관리까지를 명령하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고발하는 얕은 일에조차 역부족처럼 보였다.
솔들, 샴푸들, 샤워타올들, 수염들, 이런 것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나마 무언가 작용을 한 것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제 몸의 털처럼 두르거나 박은 마네킹들이었다. 코 밑에, 가슴에, 팔뚝에, 배꼽 아래에, 털이 난 마네킹들은 어떤 몸들을 떠오르게 했다. 다른 짐승의 털로 자신을 닦는 몸2, 다른 짐승의 털로 자신을 치장한 몸, 그리고 존재한 적 없던 털을 새로이 가지게 된 몸. 이 서로 달라 보이는 몸들이 실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마네킹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세 번째로 쓴 것은 트랜스젠더의 몸을 생각하며 적은 것이다. (다른 짐승의 털을 직접 갖다 박은 것은 아니지만) 제 몸에서 나오지 않는 (양의) 호르몬을 통해 원래는 없던 털을 갖게 된 FTM 트랜스젠더의 몸 말이다. ‘평범한 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몸이, 가발을 쓴 몸이나 솔로 닦은 몸과 정말로 많이 다를까? 실은 모든 몸들은 다른 짐승의 털로 이미 싸여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의료적 개입을 감행한 몸들은 실은 화장한 몸, 샤워한 몸, 이런 것들과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
(도구와 사용자 사이의 주객의 전도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천연의 몸과 관리된 몸, 씻은 몸과 수술한 몸의 경계를 흐리는 데에, 아니 그 경계란 애초부터 흐렸음을 보여주는 데에, 정금형의 오브제들은 유효한 듯하다. 트랜스젠더를 연구하는 이들, 노화를 연구하는 이들, 장애를 연구하는 이들이 종종 고민하는 경계들이다. 단일하고 불변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 기껏해야 불가역적인 노화만을 경험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 실은 늘 갱신되고 있는 몸들을 기를 쓰고 이런저런 범주로 나누는 것은 실은 차별 이상의 효과를 갖지 못하는 듯 보인다. 세수로, 화장으로, 수술로, 상처로, 노화로, 심지어 회춘으로, 늘 갱신되는 몸들을 떠오르게 하는 마네킹들이었다.
제 표면에 자라는 털들을 기르는 것만큼이나, 제 표면에 가해졌던 일들을 기억하는 데에 몸은 능하다. 혹자의 표현을 빌자면 이런 기억하는 몸들을 ‘아카이브로서의 몸’3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몸들엔 무언가가 덧붙여진다. 그 덧붙임들로, 지금의 몸이 된다. 솔로 씻어낸 몸과 솔을 갖다 박은 몸은 그런 의미에서 조금의 거리도 갖지 않는다. 먼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일 뿐이다.

  1. 도슨트에 따르면 그는 도구-사용자라는 객체-주체 구도를 뒤집어 보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예컨대 스킨케어 용품은 인간의 피부를 관리하는 데에 사용되는 도구이지만, 또한 인간에게 자신에 대한 세심한 관리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도구로 삼는 주체가 되는 국면이 드러날 수 있다고 했다. 또 한편으로 그는 워낙에 마네킹에 뭘 붙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2. 전시된 솔들이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3. 루인,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 트랜스젠더퀴어, 바이섹슈얼 그리고 혐오 아카이브」, 윤보라 외 공저,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서울: 현실문화연구, 2015, pp. 165-225에서 읽은 표현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루인 역시 누군가의 표현을 빌렸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정확할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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