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하기와 관극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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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II〉(콜렉티브 뒹굴 제작, 성지수 연출)라는 연극에 (지분 적은) 배우로 함께 했다. 후반 한 달 정도의 연습에 참석한 것 같다. 공동작업, 반복연습, 무대에 오르기 ― 무대에서 나의 실수를 내어보이기 ― 와 같은, 내가 싫어하는 요소들을 많이 가진 일이다. 연극이란 말이다. 어쨌건 한 달을 연습했고, 무대에 올랐다. 공연을 마쳤다. 그 경험을 정당화해 보기로 했다.

* 연극하기 ― 내부자되기의 경험

나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보다는 글로서의 텍스트에 집중하는 편이다. (배우들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은 나름대로 중요한 관극 경험이긴 하지만) 굳이 공연을 보지 않고 텍스트로 읽어도 나로서는 그다지 큰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내가 굳이 무대에 오른다는 것, ‘같은’ 극을 반복해서 무대에서 연기한다는 것은 생경한 일이다.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 크게 나쁠 것은 또 없었으므로, 연출의 요구에 최대한 (내 몸이 허락하는 한) 따르는 정도로 함께 했다.

그럼에도 특별한 경험이었던 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내부자되기’의 경험을 말해야겠다. 연습 과정에서 연출은 수 없는 세밀한 요구들을 제시한다. 배우들은 (물론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 가며)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 가며 그 요구를 구현해 낸다. 미세한 차이들을 가진 여러 개의 연기들 가운데 연출은 무언가를 택하고, 최종적인 무대에서 그것을 재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요구는 무력하다. 때로는 배우의 실수에 의해, 때로는 배우의 욕심에 의해, 그리고 종종 어쩌면 인간이 갖는 어떤 한계에 의해, 무대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만다. 약속된 장면 (혹은 휴지) 이 누락되거나 약속되지 않은 장면 (혹은 휴지) 이 삽입되는 일에서부터 대본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연출이 요구한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면 장면이 구성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런 경우는 많고 다양하다.

요컨대 연극 (을 비롯한 공연예술) 은 연출가의 최종 승인 없이 ‘최종 형태로서’ 공개되는 셈이다. 연출가가 머릿속에 그려두고서 객석 어딘가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이상적인 장면은 무대 위에서는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혹은 반드시 누군가들이 나누어 책임질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다. ‘공연’을 통해 무대에서 그려지는 것들은 말이다.

이 지점에서 배우들 (그리고 연습 과정에 함께 한 스태프들) 은 하나의 특권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 무대 위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연출된 장면, 약속된 장면, 조작된 장면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홀로 아는 위치 말이다. 언제나 조작된 허구인 동시에 바로 그 순간 펼쳐지는 실재인 무대 위의 장면들, 그것들에 대한 작은 진실을 아는 특권적인 위치를 그들은 점하게 된다.

‘내부자되기’의 경험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켜 쓴 말이다. 드러나는 것 이상을 알 수 없는, 그러니까 예컨대 누군가가 말한 것만을 알 뿐 그 너머의 진심을 알 수는 없는 일상세계를 살아가는 것과는 분명 다른 이 경험은 어떤 무대를 준비하고 실현하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어디에 쓸모가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 관극하기 ― 작가되기의 경험

공연이 아닌 형태를 취하는 예술들, 예컨대 문학이나 영화, 혹은 녹음된 음악과 같은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작가 (혹은 제작자라도) 의 최종 승인을 거쳐 공개된다. 성격에 따라 혹은 능력에 따라, 세부 요소들이 얼마나 세세히 검토되었는지는 각각의 경우마다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완성된’ 시점에서야 비로소 수용자들에게 내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내어진 것이 수용자들이 감상할, 혹은 해석할 텍스트가 된다. 해석은 수용자의 몫이라는, 해석되는 시점에서야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라는 견해가 팽배한 요즘이지만, 수용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해석의 방향이지 해석의 대상 자체는 아니다. 작가가 섬세하지 못해서, 이를테면 작가의 실수로 삽입된 요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작가가 최종적으로 승인해 작품에 포함시킨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의 대상으로 남는다. 수용자가 마음대로 무언가를 제거하고 작품을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출가라는) 작가의 최종 승인을 거치지 않은 채 수용자에게 내어지는 공연 예술은 ― 그것이 대본이나 악보 혹은 무보에 충실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념을 벗어난 것이라면 더더욱 ― 문자 그대로 수용자에게서 완성된다. 무대에서 벌어진 어떤 일을 연출가가 요구한 것으로 볼지 아니면 지금 그 순간 어떤 실수를 통해 생성된 ‘실재’로 볼지의 문제는 관객에게 맡겨진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작품’으로, 그러니까 자신이 감상하고 해석해야 할 텍스트로 삼을지를 관객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 감상을 위해 수용자가 행해야만 하는 의무이자, 다른 형태의 예술 수용에서는 가질 수 없는 특권이다. 어떤 지점에 특정한 장면을 삽입한 작가의 의중을 파악해야 하는 문학의 독자와는 달리, 어떤 지점에 숨소리를 삽입한 가수의 의중을 파악해야 하는 음반의 청자와는 달리, 공연예술의 관객은 자신이 방금 목도한 장면을 이 작품의 일부로 볼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나아가 무대 위의 작품을 연출가에게 귀속시킬지 혹은 극작가나 배우에게 귀속시킬지 ― 그들 모두가 작업에 참여했으며 그들 중 누구도 권위를 갖고서 그 장면을 최종적으로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 를 관객은 결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공연이 고정된 ‘작품’으로서 귀속되는 곳은 결국 관객 자신이다. 요컨대 관객은 하나의 공연을 관람함으로써 스스로 작가의 위치에, 작품에 대한 최종 승인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공연 예술의 관객들만이 갖는 특권이다. 역시, 어디에 쓸모가 있을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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