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무대에 올리기

어떤 장애인들의 몸에는 쓸데없는 움직임이 있다. 효율적인, 최적화된, 그런 움직임에 속하지 않는 떨림들, 흔들림들, 비틀거림들, 혹은 (흔히 ‘문제행동’이라 불리는) 반복적인 행동들.1 그 쓸데없는 움직임을 멈추지 못하면, 쓸모 있는 움직임만을 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는 장애인이라 불리며 여러 삶의 현장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 몸을 갖고서 연극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아마도 큰 도전일 것이다. 대본에 적힌 것만을 충실히 수행해 낸 후 무대에서 내려가지 못하는 어떤 몸이, 배우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서는 것은 아마도 큰 도전일 것이다. 작지만, 이런 이들이 오르는 연극은 보는 사람에게도 하나의 도전이다. 어떤 것이 장애로 인한 움직임이고 어떤 것이 약속된 움직임인지 끊임없이 분류하며 하나의 극을 완성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십 년쯤 전일까, 장애여성극단 춤추는허리의 공연을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한 명의 장애인과 네 명의 비장애인으로 구성된 5인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것 같다. 비장애인 성원을 연기한 것 역시 장애인 배우들이었다. 남성을 연기한 것 역시 여성이었다. 배우와 배역을 분리해 가며 극을 보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난다.
어제 본 것은 노래하고 기타치는 페미니스트 수수와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의 콜라보 무대.2 스토리 대신 몸짓과 소리가 주를 이루는 공연이었고, 무대 위에서는 예의 “쓸데없는 움직임”들로 가득한 몸짓들이 이어졌다. 한 걸음을 걷기 위해서 배우는 몇 번이나 비척거렸고, 휠체어를 앞이나 뒤로 움직이기 위해서 몸을 뒤나 앞으로 젖혔다.
스토리가 중심이 되는 연극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 쓸데없는 움직임들은 스토리를, 그리고 스토리상의 설정들을 파악하는 데에 방해가 되곤 하지만 ― 하지만 그 방해에서 솟아나는 의미들이 분명히 있고, 그것은 이번 경우와 다르지 않다 ― 몸짓이 중심이 될 때, 이 움직임들은 몸짓의 일부로 녹아든다. 깔끔하게 구상된 어떤 움직임을 그대로 수행하지는 물론 못했을 것이다. 왼쪽으로 걸어가자, 고 약속한 장면은 왼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는 식으로 수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몸짓이 중심인 이 공연에서 ‘쓸데없는’ 움직임은 없게 된다. 떨림, 흔들림, 비틀거림 ― 이 모든 것은 배우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몸이 살아가는 방식, 장애를 가진 몸이 몸으로서 존재하는 방식을 이 모든 움직임들이 드러낸다. 무대는 각본이 재현되는 곳을 넘어, 이 몸들이 비로소 편견으로부터 ― 평가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공간이 된다.
일상의 재현을 포기하는, 혹은 넘어서는 무대는 ‘일상’이라는 관념을 파괴한다. 효율성이라는 기준으로 구성된 일상이라는 관념을 파괴함으로써 이 무대는, 외적인 잣대로 평가 받지 않는 몸짓들을 가능하게 한다. 여전히 그들은 걷는 것이 힘에 부치고 팔을 곧게 펼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니게 된다. 장애를 판정할 기준이 이미 파괴되었으므로.

  1. 물론 그 움직임들의 상당수는 본인에게는 꼭 필요한 것일 터이다.
  2. 장애여성공감 20주년 기념행사의 여는 무대였다. 제목은 따로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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