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서사 앞에서 자기 서사 찾기

수업 시간에 발표한 글.
영화 대사를 제외한 인용은 모두 
이종환, <88만원 세대가 본 써니, 아줌마들 그렇게밖에 못해요?: 역사와 다른 세대를 소외시키는 아줌마들만의 연대>, 미디어투데이, 2011.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340

거대 서사 앞에서 자기 서사 찾기
: 영화 <써니>를 통해

영화 <써니>는 중년 여성인 주인공 임나미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 하춘화의 부탁으로 과거 ‘써니’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함께 놀던 친구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임을 깨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 시간을 다소 여유롭게 쓸 수 있으며, 친구들을 찾기 위해 망설임 없이 흥신소를 찾을 수 있는 인물, 이라는 영화적 장치가 제공한 자유 속에서 임나미는 자신의 친구들과 자신의 과거를 찾아나간다.
대중성을 염두에 둔 상업 영화로서의 <써니>는 임나미의 친구들이 처한 경제적 곤란, 그러니까 빈부 격차의 문제라든가 임나미와 친구들이 보낸 학창시절의 역사적 배경이라 할만한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다분히 가볍게 ‘처리’하고 있어, 몰정치적인, 혹은 비정치성을 가장한 우파적인 노스탤지어 영화의 계보를 잇는다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아무리 부유층이라 한들, 주인공 임나미는 거대서사―이 글에서 임나미를 둘러 싸고 있는 거대 서사로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주부의 역할’이라는 현재적 상황 두 가지를 다룰 것이다―에 맞서 투쟁하며 자신의 역사를 찾아나가야 한다. 혹자는 “대한민국 상위 1%”의 주인공이 “황금만능주의”적 관점으로 모든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하기로 한다.)
현재를 있게 한 배경으로서의, 또한 현재를 긍정하는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이들의 가치관의 토양으로서의 80년대는 물론 중요한 것이나, 그것이 개인의 역사를 억압하는 형태로 긍정되고 기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 <써니>는 상업 영화라는 한계 속에서도, 거대 서사의 압력에 맞서 약자로서의 개인이 어떻게 자기 서사를 복원할 수 있을지를 그리고 있다.

거대 서사로 수렴되는 삶

영화는 한 고급 아파트의 침실에서 시작한다. 단순한 필요 이상의 외관을 갖춘, 잘 디자인 된 알람시계가 울리면서 임나미의 하루는 시작된다. 그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과 아이를 깨운 후에야 겨우 세수를 한다. 식탁에서 가족들에게 건네는 말은 대답 없는 허공에의 메아리가 될 뿐이다. “엄마, 아내로만 살았다”는 임나미의 말대로, 가정주부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그의 삶에서 ‘임나미’라는 개인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돈 잘 버는 남편이 쥐어 준 돈으로 ‘명품 백’을 사서 병상에 있는 엄마를 찾아 간 장면에서도, 그는 딸로서 존재할 뿐이다. ‘시집 잘 간 딸’을 병실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엄마의 앞에도 임나미라는 한 사람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부장적 사회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며 사는,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이 삶을 이 글에서는 ‘거대 서사로 수렴되는 삶’이라 부르고자 한다.
어린 시절의 임나미는 어떠한가. 10대의 임나미에게 부여된 임무는 학교에 다니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중년 임나미의 삶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학교는 분명히 개인에게 특정한 생활을 강요하는 공간이지만, 그 속에서는 ‘해야 할 일’이 부과되기보다는 ‘하면 안 될 일’이 제시되기에 다소 자유의 틈이 있으며, ‘하면 안 될 일’조차도 임나미는 소위 불량써클의 일원으로 살면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80년대, 민주화 운동이라는 역사는 임나미의 삶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의 오빠는 민주화 운동가로서 극중에서 수배 받게 되는 처지에 있으며, 반대로 그의 아버지는 정권을 위해 일하는 공무원이다. 임나미가 실제로 겪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군부 정권과 국민들 사이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오빠와 아버지 사이의 갈등일 뿐이다.
주부의 삶보다 거대 서사라는 말이 다소 쉽게 연결될 이 민주화의 역사로 소녀 임나미의 삶이 수렴되지는 않는다. (물론 당시에는 다수의 10대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지만) 사회적 요건들로부터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10대 학생보다는, 오히려 이에 수렴될 것을 요구받는 것은 중년이 되어서 당시를 회고하는 임나미다.
앞서 언급한, 노스탤지어 상업 영화로서의 <써니>를 비판하는 입장은, 중년이 된 임나미가 ‘적절한’ 역사의식을 갖고서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보다 진지하게 다룰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개인의 역사를 복원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거대 서사와 충돌하게 된다. 주부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동시에 자기 역사를 복원할 여유를 가질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삶에 직접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은 역사에 무게를 두는 것은 무게 중심을 자기 역사로부터 먼 곳으로 옮겨 놓게 되는 것이다.

자기 서사 복원과 거대 서사의 충돌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달리 말하자면 사회역사적 배경 속에서, 또 달리 말하자면 거대 서사 속에서 살고 있는 개인이 이를 내려놓고 자기 서사를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자신의 역사를 찾아 가는 임나미의 행보는 가정주부의 역할을 부과하는 가부장제의 거대 서사와,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 서사 앞에서 ‘작은 것’일 뿐인 자기 서사 복원을 뒤로 미루라는 압력을 영화 안팎으로부터 받게 된다.
영화는 임나미를 부유층으로 설정해 친구를 찾는 과정을 흥신소를 통하게 함으로써 수월하게 해 주는 한편, 남편을 급작스레 장기 해외 출장을 보냄으로써 시간적 자유 또한 내어준다. 상업 영화의 특성상 일련의 영화적 장치를 통해 주인공 임나미의 자기 서사 복원은, 힘겨운 투쟁이라기보다는 즐겁고 여유로운 회상으로 그려진다.
대신 투쟁은 임나미의 친구들을 통해 드러난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서금옥은 친구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외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일단은 남편이 가족을 부양하고 있지만, 자신도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으며,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금옥이 집을 나서는 것은 친구의 부음을 들은 뒤, 그나마도 “밥상을 엎어버리고” 나서다.
윤복희는 사정이 더 나쁘다. 그는 써니의 일곱 멤버 중 유일하게 어릴 적의 꿈을 이루었지만―미스코리아가 되었지만― 집안의 경제란으로 인해 지금은 술집에서 일하는 처지다. 여전한 경제고로 인해 딸과도 떨어져 살고 있으며, 알콜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 역시 서금옥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둔 친구를 만나러 가지 못하며, 부음을 듣고 장례식장에 와서도 자신의 처지를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가부장제의 거대 서사와 충돌하는 것은, 자기 서사의 복원 이전에, 자기 서사의 창출에서부터다. 부유층이 된 세 명의 멤버를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한시나마 꿈을 이룬 것은 한 명 뿐이며 나머지는 ‘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애당초 그 꿈이라는 것부터가, 예뻐지는 것, 미스코리아가 되는 것, 연예인이 되는 것 등으로 매우 제한적인 것일 뿐이다.
한편, 앞서 말했듯, 80년대의 역사라는 거대 서사는 영화에서는 가볍게 처리된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은 임나미 가족 내부에로 제한되며, 거리에서 마주치는 민주화 시위는 써니 무리와 다른 학교 불량 써클 간의 패싸움에 배경으로 처리될 뿐이다. 한데 얽혀 싸우던 시위대와 전투경찰은 써니 무리들과 또 얽히고, 써니의 대장격인 하춘화는 자신의 친구들을 붙잡은 전경들을 일격에 쓰러뜨린다. 이 장면은 매우 ‘코믹하게’ 연출된다.
거대 서사를 축소시킨 이러한 연출은 영화 밖에서 비판에 직면한다. 비판은 원색적이다. “아무리 부유하다해도 자기가 살던 시대의 반 독재정권 시위를 칠공주의 패싸움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그 역사 인식수준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나미의 편협한 역사적 관점은 관객들에게 복고라는 포장지에 숨겨져 은밀히 강요된다.”는 것이다. 영화 밖의 논자는, 주인공의 ‘수준’을 의심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오히려 강요되는 것은, 거대 서사에 대한 부채의식이다. 임나미를 비롯한 써니 멤버들의 삶이, 민주화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열악했으리라는 데에 물론 이의의 여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 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임나미의 멤버들에게 민주화가, 적어도 한국의 민주화가 제공한 것은 몇 년에 한번 씩 주어지는 투표의 기회뿐일 것이다. 민주화는 ‘소녀’들이 ‘큰 꿈’을 가지게 해 주지도 않았고, 작은 꿈이나마를 실현시키게 해 주지도 않았다.
민주화의 이면에 있는 산업화의 덕을 입은, 비하하자면 기생한 것으로 말할 수 있을 ‘부유층’ 임나미의 경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아침부터 소란스레 가족들 치다꺼리를 하는 임나미의 일상은, 지난 날 그의 어머니의 일상과 정확히 겹쳐진다. 영화에서, 임나미도 그의 어머니도, 자신들이 그다지도 챙기는 가족들에게 아무런 발언권도 갖지 못하지 않던가.
자기 역사에 긍정적 배경이 되지 않은 거대 서사에 무게를 두라는 것은 부당한 요구다. 부정적 배경이 되었다면 그 역시도 나름의 무게를 가질 수 있겠지만, 임나미의 서사가 그러한 경우인 것조차 아니다. 임나미의 역사에서 민주화의 거대 서사는 배경으로 ‘처리’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무게 없는 배경이었을 뿐이다.
자기 서사 복원과 거대 서사 사이의 충돌은 두 서사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도, 자기 서사를 찾아 나서는 이의 무능력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가부장제의 거대 서사, 민주화의 거대 서사를 강요하는 것은 그 거대 서사가 자신의 삶과 일치되는 사람들, 그러니까 힘들여 자기 서사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물론 이들의 경우에도, 스스로에게서조차 영영 잊혀진 자기 서사가 있겠지만 일단 제쳐 두기로 하자.)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역할을 다 하고서 자기 자신의 서사까지도 복원하고 또 창출하는 ‘알파걸’이 되기 위해 용쓸 것이 아니라면, 자기 서사를 복원하는 동시에 그와 동떨어진 거대 서사에 대한 까닭 모를 예의를 다하기 위해 진을 뺄 것이 아니라면, “상을 엎어 버리고” ‘일격에 쓰러뜨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영화가 증언하는 것

<써니>를 상업 영화의 공식에 충실한 노스탤지어 영화로 읽는다면,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그 때는 참 좋았지’, ‘그때는 참 순수했지’ 하는 것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화에도, 관객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독해일 뿐이다. 그 때는 좋지만도 않았다. 소녀들의 싸움 속에서도 피는 흘렀고, 얼굴에 상처를 입은 연예인 지망생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영화가 증언하는 것은 오히려, 좋았건 아니건, 순수했건 아니건, ‘누구에게나 자기 서사가 있다’는 것이다. “엄마, 아내로만 평생을 살았는데, 알고 보니 내 삶에서는 나도 주인공이었더라.”는 임나미의 말은 자신의 삶이 희극이었는지 비극이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영화가 말하는 것은 누구나가 자기 서사의 주인공이라는 것, 거기까지이며 그 외에 암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의 서사 창출을 포기했을 지금조차도 앞으로의 서사를 창출해 나가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하춘화의 장례식장에서 모인 써니의 멤버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술을 한 잔 기울이고는 다시 흩어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들의 모습은 ‘그 때는 나도 주인공이었지’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는 주인공의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영화적 장치는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춘화의 유산이다. 자신의 말년을 병원의 호화로운 특실에서 지내던 하춘화는 기업을 소유한 부자로, 자신의 유산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던 것이다. 장례식장을 찾아 온 하춘화의 변호사는 부유층 친구들에게는 써니의 ‘짱’과 ‘부짱’ 자리를, 생활고에 시달리며 꿈을 버린 친구들에게는 꿈을 향해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남겨 준다는 하춘화의 유언을 전한다.
자기 서사를 복원하고 창출하는 과정은 거대 서사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는 점에서, 양상이 어떻든 본질적으로 투쟁이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업 영화로서의 써니는 이러한 투쟁을 생략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조차도 <써니>를 비판하는 이가 내세우는 왜곡된 투쟁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임나미의 ‘수준’을 의심하며 거대 서사에 수렴될 것을 요구했던 논자는 “꾸준히 노력해서 정당하게 취업하려는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세진(정유미)과 같은 청년 실업자”를 언급하며 부유층 주인공의 명품 가방이 “20대의 머리 위로 내려쳐 진다”고 통탄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실낱같은 희망인 자기계발의 신화도 돈 많은 엄마 친구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것이 신화인 이상, 우리는 그것을 비웃을 수밖에 없다. “정당하게 취업하려는” 노력은 신화에 속아 거대 서사에 매몰된, 왜곡된 투쟁일 뿐이다.
이 논자는 “아줌마들의 연대는 성공했지만, 그녀들의 딸과 아들인 88만원 세대들은 안중에도 없나 보다.”며 다른 세대를 위해 연대하라는 또 다른 거대 서사를 요구한다. 그 다른 세대를 위해 희생하느라, 엄마로만 사느라, 자기 서사를 송두리째 잃었던 이들에게 말이다.
하춘화의 돈으로 그러한 요구를 비웃으며, 영화는 증언한다. 주인공은 역사가, 거대 서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영화는 영화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말을 마지막 절의 제목으로 붙인 것은, 명백한 상업 영화인 <써니>의 크고 작은 한계들을 묻어 두고 좋은 점을 찾아 읽으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대 서사를 강요하는 비평이야 어찌 되었건, ‘돈’으로 수렴되는 영화적 장치에 과도하게 의존한 점이라든가, 비록 자신의 역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큰 역사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코믹하게 처리함으로써 다양한 오해의 여지를 둔 점은 물론 비판받을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서는 비평의 중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제목을 붙인 것은, 역시나, 상업 영화가 보여 주는 환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 말을 하는 것은, 필자가 아니라 영화 <써니>다. 영화의 초반부에 엄마의 병실을 찾은 임나미를 비추는 카메라에는, 병실 티브이에서 방송되는 일일드라마와 그것을 지켜보는 환자들이 함께 잡힌다. 환자들이 “설마 남매는 아니겠지”하고 말하면 드라마 속 주인공은 “실은 우리 남매야” 하고 말하고, 환자들은 여전히 티브이에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듯 비명을 지른다.
설마 하춘화가 유산을 남겨 줘서 모두가 행복해지지는 않겠지, 하는 관객들의 의심은 해피엔딩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상업 영화의 말미에 현실로 드러난다. 그 대목에서도 여전히 관객들은 영화의 흥에 취해 즐거워하며 보고 있겠지만, 극장에서라도 속으로나마 비명을 지를 수는 있다.
“아마도 감독은 나미 어머니가 병동에서 보는 ‘막장 드라마’처럼 관객들이 상위 1%의 화자에게도 충분히 공감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모든 것에 공감하지는 말 것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으며 영화를 보기를 요구하고 있다.
자기계발의 신화만큼이나 돈 많은 친구의 유산 역시 헛된 신화일 뿐이다. 영화가 남기는 것은, 친구의 돈으로 꿈을 되찾은 인물들을 통한 대리만족이 아니라, 어떻게든 찾아내어야 할 자기 서사의 존재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자신에게로 수렴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그 어떤 거대 서사 앞에서도, 심지어 민주화 운동의 시대에 민주화의 성지 광주의 지척에 있는 벌교에서 온 임나미에게도, 자기 서사는 분명히 존재한다.
비록 상업 영화는 거대 서사와의 전면적인 투쟁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다행히 “밥상을 엎으라고” 은근히 부추길 수는 있었다. 돈도 잘 벌고 시어머니도 잘 모시면서 어린 날의 친구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알파걸’이 되라는 거대 서사의 신화에 빠지지 말고, 투쟁하면서 자기 서사를 찾으라는 것, 자신의 삶에서는 언제까지나 자신이 주인공이므로 쉬지 않고 서사를 이어나가라는 것, 그것을 부추길 수는 있었다.
영화는 영화다. 진짜 자기 서사는, 영화 밖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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