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소사이어티, 〈노동집약적 유희 2017: 테마파크〉

얼마 전 버스에서 행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량진 고시촌에서 공부하는 친구 이야기였다. 통장에 74원이 남았다고 했다. 전에도 50원만 남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 삶들에 관한 연극이다. 丙소사이어티의 〈노동집약적 유희 2017: 테마파크〉(송이원 설계 및 연출, 丙소사이어티 공동 구성)는 현대 한국사회의 비루한 삶들을 다룬다. 누군가는 그것을 청년의 삶이라 부르겠지만, 이 연극에 관련된 인물들 ― 제작한 이들부터 관람한 이들에 이르기까지 ― 의 상당수가 그렇게 범주화되겠지만,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청년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진 것 없는 삶 일반이 처한 현실에 관한 문제다.
이 “테마파크”는 이제는 고전이 된 보드게임 〈부루마불〉의 형식을 차용한다. (그렇다, 〈모노폴리〉가 아니라 〈부루마불〉이다.) 노동을 통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칸과 소비를 통해 HP를 채울 수 있는 칸이 늘어선 게임판, “참여관객”들은 그 게임의 말이 되어 주사위를 굴린다. 때로는 랜덤한 행운 또는 불운이 주어지기도 한다. 무인도 대신 우울증 칸이 있고, 한 바퀴를 돌면 월급을 받는 대신 월세를 지불한다. 한 칸 한 칸 이동할 때마다는 교통비를 지불해야 한다.
때로는 체력을 쓰고 돈을 벌며, 때로는 돈을 쓰고 체력을 벌며, 말들은 게임판을 돈다. 월세나 교통비, 공과금과 같이 체력을 채워주지 않으면서도 써야만 하는 돈들도 있다. 그렇게 판을 돌다 보면 한 명씩 파산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부루마불〉과 달리 〈노동집약적 유희 2017: 테마파크〉에는 승자가 없다. 마지막 한 명이 파산할 때까지 게임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일반 관객들은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며 말들을 응원하다, 끝내 위로의 박수를 보내고 만다. 마지막 말이 파산하는 순간, 예고 없이 연극은 끝난다. 마무리 같은 것은 없다.

종합선물세트
‘스토리’라 할 만한 부분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구성한 이 연극은 그 형식적 측면에서는 가능한 모든 실험을 다 시도하기로 한 듯하다. 전문 배우를 쓰는 대신 사전 신청을 받은 ‘참여 관객’을 무대에 올리고, 거리 ― 노동자들의 집회가 종종 열리는 보신각 앞에 무대를 세우고, 입장료를 받는 대신 크라우드 펀딩으로 운영비를 마련하고, 게임의 판과 대본은 인터넷을 통해 다운로드 받아 누구든 플레이 할 수 있도록 했다. 무대 뒤의 스크린에는 영상이 펼쳐지고, 음향도 공들인 티가 난다. 참여 관객들은 자신들이 무대 위에 올라 있었던 시간만큼, 그러니까 첫 출발에서 파산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만큼에 해당하는 시급을 받는다. 또 무언가 있을까, 이외에 실험을 할 수 있었을 부분이.
전방위적인 실험으로 구성된 이 연극 혹은 놀이는 (흔히들 말하듯, 영어 play나 독일어 Spiel 등은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지닌다) 가히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좋을 법하다. 그러나 과자 종합선물세트를 받아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꾸러미 속에 특별한 무언가는 없음을 말이다. 사전 신청으로 모아 기본적인 연습을 시킨 참여 관객은 관객이기보다는 아마추어 퍼포머에 가까운 위치에 놓인다. 행인들과 별다른 소통을 해내지 못하는 거리 공연은 극장 공연과의 특별한 차이를 낳지 못한다. 특정한 실험에 집중했더라면, 그 실험을 보다 본격화했더라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인터넷을 통해, 그리고 크라우드 펀딩 리워드로, 관객들에게 배포된 말판이 어떤 효과를 낳을 수 있을까? 미리 신청해 무대에 오른 이들보다는, 오히려 집에서 친구들과 이 게임을 함께 플래이할 이들에게 더 어울릴 말일지도 모른다, “참여 관객”이라는 이름은 말이다. 〈노동집약적 유희 2017: 테마파크〉에 유효한 실험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연극을 극장에서 거리로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집으로 들려 보냈다는 점에 말이다.

“연극적 자살”
유난히 숫자가 많은 연극이다. 각 칸마다 벌거나 쓰는 돈이 정해져 있고, 무대 옆으로는 각 플레이어의 잔고와 체력을 수치로 보여주는 스크린이 설치된다. 연극의 홍보는 “6470원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라는 제목으로 행해지며, 여기에는 “합계 약 2,930,000원(작품 창작 및 제작에 대한 인건비 미합산)”이라는 연극상연 의 필요 비용이 공개된다. 말을 자청한 참여 관객들에게는 시간당 6,470원이라는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이 지급된다. 연극의 제작부터 참여자의 상태까지가 모두 숫자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러한 숫자로의 환원을 그들 스스로는 “연극적 자살”이라고 칭한다. “우리 스스로를 숫자로 탈바꿈하는 ‘연극적 자살’을 감행해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다. 인간 개개인을 가장 덜 추상화하고서 보여주는 장르인 ‘연극’에서 최대한의 요소를 추상적인 숫자로 환원한다는 것은 말이다. 모든 것이 수치화되는 사회 구조 자체를 보여주는 방식이자 그 사회 구조 속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방식으로서 이 숫자로의 환원은 택해진 듯하다. ‘크라우드 펀딩이 성사되지 않으면 연극은 상연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다행히 펀딩은 성사되었고, 이 숫자로의 환원은 동시에 숫자들의 무대화 ― 그러니까 탈-수치화 ― 가 되었다.
“연극적 자살”은 다른 의미로도 읽힌다. 1회의 거리 공연으로 기획된 이 작업은 언제 또 어떻게 상연될 수 있을까? 이백구십여 만원이 필요하고 펀딩으로 생긴 추가 금액은 작업자들의 임금으로 쓰겠다고 했지만 추가 금액은 십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참여 관객들 역시 무대에 오른 시간에 대한 임금을 받을 뿐 준비 시간에 대한 임금은 받지 못했다. (이것은 이 연극의 한계일까, 메타적 비평 장치일까.) 이 연극을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할 것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나의 희망은 이것이 관객들에게 배포되었다는 점이다.)
연극은 언제나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늘 자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면, 반복되지 않으면 정말로 그저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나는 이 실험이 어디선가 계속되기를, 그리고 그것이 말들의 파산 뿐 아니라 제작자들의 파산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부터 이어가 봐야 할 모양이다, 골방에서나마나 게임판을 펼치는 것으로써 말이다.

연극/놀이 소개 및 다운로드는 여기.

丙소사이어티, 〈노동집약적 유희 2017: 테마파크〉」에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안녕하세요 🙂 丙 소사이어티에서 연출하고 있는 송이원입니다. 많은 생각거리 던져주는 긴 호흡의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욱 많은 분들과 나누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드는데, 이 글을 丙 소사이어티 SNS로 공유해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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