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음, 에 대하여

아무런 장식 없는 흰 방은 넓다. 천장에서는 이따금 수도관을 따라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다해서 십여 개인 객석은 아직 비어 있다. 무대임 직한 공간 ― 의자들이 마주보고 있는 빈 공간 ― 에서 사람 하나가 서성이고 있다. 아니, 비척이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까. 벽을 바라보거나 쓸거나 하던 그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바라본다. 말없이, 과장된 얼굴로 웃으며 손을 움직여 나를 객석으로 안내한다. 배우인 모양이다.

객석이 조금 차고 공지된 시작 시각이 된다. “죄송한데 오늘이 공연 마지막 날이라서요, 오 분 정도만 더 기다렸다 시작해도 될까요?” 하고 묻는 배우의 표정은 곤란을 숨기지 못한다. 과연 저 사람이 혼자서 한 시간짜리 무대를 끌고 나갈 만한 끼를 갖고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러나 능란한 완급 조절과 함께 시간은 금방 흐른다. 김은한의 1인 극단 매머드머메이드가 2015년부터 몇 차례인가 무대에 올려 온 연극, 〈변신하지 않음〉(서울: 서교예술실험센터, 2018.06.05-15.)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모티프로 삼되 아무도 아무것으로도 변신하지 않는 이야기다. 그의 말대로 그가 벌레가 되어 무대에 등장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볼거리는 확실하니까. 그러나 역시 그의 말대로, 갑작스러운 비극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삶은 대개 서서히 나빠지고, 잠깐 좋아 보이는 순간마저도 하향 곡선 위의 작은 융기에 불과할 뿐이다.

아무것으로도 변신하지 못한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생긴 빚을 갚으려 원단 업체 영업 사원으로 일하는 자신의 일상을 늘어놓는다. 차라리 벌레가 되었더라면, 그래서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쫓겨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것들은 그저 삶에 지친 그의 상상일 뿐이다. 그는 그저 감기에 걸려 출근하지 못했다가 상사의 질타를 받는다. 별다른 사건조차 없이 가족들과 조금씩 멀어진다. 엄연한 사람이지만 구애에 실패한다. 벌레도, 쥐도 되지 못한 채, 그런 것들이 되는 악몽에만 시달리며, 그는 힘에 겨운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가 일상에 휩쓸려 가기만 하는 것은 아닐 테다. 넋두리밖에는 할 일이 없을지언정, 이렇게 관객들을 불러 모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벌레가 되지 못한 그, 파란만장한 이야깃감을 갖지 못한 그로서는 공간을 채우는 일이 힘에 부친다. 관객들이 그의 연기에 ― 그는 계속해서 긴장된다는 말을 하고, 종종 관객에게 말을 건네며, 뜬금없이 1분짜리 인터미션을 가지며 기록용 카메라를 체크하기도 하므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연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 집중하는 동안에도 흰 방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

그는 상상해 본다. 차라리 이 공간이 하나의 작품이고 자신이 도슨트로서 서 있다면, 관객들의 침묵이 조금은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 노출 콘크리트로 된 천장에 드러난 붓자국들은 지향점 없는 벌레가 이리저리 기어 다닌 흔적들이 된다. 그러나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청소는 벌레도, 그들의 체액도 모두 지워 버렸으니 관객들 앞에 있는 것은 여전히 텅 빈 공간뿐이다. “수행의 과정은 철저하게 감춰지게 되고, 빈 공간만이 남아 실존의 문제를 제기”한다.

연극의 무게가 부담스러워 상상 속에서 잠깐 일탈해 본 것이지만, 실은 연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대를 구상하고, 연기를 연습하는 모든 과정들이 삭제되고 그 흔적일 뿐인 공연만이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공개된다. 결국 관객들은, 저 과정들의 빈자리만을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변신하지 못한 그레고르 잠자의 넋두리는 뜻하지 않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변신하지 않음〉은 어쩌면, 아니, 이 변신하지 못한 그레고르 잠자는 어쩌면, 더 이상 변신조차 상상할 수 없이 삶을 견디는 일밖에는 남은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시대에 예술의 역할을 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슨트가 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공간에 예술로서 기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아무 말이나 하고 있고요.” 이것은 그저 겸손일까, 아니면 기껏 시간을 내어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을 기만하는 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스스로 생각한 예술의 역할을 돌려 말해 본 것일까.

어떤 스펙터클이 아니라 일상의 아무런 말들이 어쩌면 그 ― 이 ‘그’라는 것이 김은한인지 그레고르 잠자인지 나는 모르겠다 ― 가 생각하는 예술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끝없이 아름다운 것을 채워야만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이 두렵지만 노력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벌레가 되지 못한 것은 어떤 무대를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지만, 어떤 다른 무대를, 혹은 어떤 다른 삶을 생각한다면 아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갑작스레 벌레가 되지 않는다면, 지난 밤 생각했던 무언가를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또, 실패한 채 넋두리만을 늘어놓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공연이 끝나면 그는 관객들에게 대본을 나누어 준다. 그레고르 잠자가 긴장해서는 일순 김은한이 되어 주워섬기는 듯했던 모든 말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대본이다. 관객들은 그제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벌레가 되지는 못했지만, 배우가 되는 데에는 성공했음을 말이다. 모두가 속은 셈이다. 이로써 한 가지를 배웠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의심하는 법을. 도슨트의 말을 의심하는 법을. 고된 일상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예술은 속 편한 도피처가 되어 주지 않을 것임을. 예술 또한, 정신 차리고 의심해야 하는 어떤 적임을 말이다.

그래, 심성 고운 그는 희망적인 말들로 공연을 마무리하고 싶어 했지만, 예술은 어쩌면 적이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해석해야 하는 적 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서 그레고르 잠자의 마음을 살피거나 작가의 의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는 그러한 변신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 변신 없는 내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를 고민하는 것, 그런 것이 어쩌면 독자의 할 일일 테다. 그렇다고 한다면, 카프카의 독자로서 김은한은 훌륭한 셈이다.

  • 이 글은 서교예술실험센터의 2018년 소액多컴 선정자 작업 리뷰를 위해 작성한 것으로, 센터 카페에 게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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