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을 전시하기

《신여성 도착하다》(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17.12.21.-2018.04.01.)는 좋은 자료실이다. ‘신여성’이라 불리는 이들이 사용했던 물건,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그림, 그리고 그들의 쓴 글이나 그림, 부른 노래에 이르기까지 그들에 관한 많은 작품 혹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일제 강점기 ‘신여성’이라는 새롭고도 복잡한 ‘현상’을 관찰하는” 1부, “근대기 ‘신여성’ 자체였다고 할 수 있는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2부, 그리고 “다양한 분화에서 활동했던 ‘신여성’들의 삶을 집중조명하고, 이들의 실현되지 못한 꿈을 주제로 한 현대 작가들의 신작 작품들이 전시”되는 3부.1
이러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신여성 도착하다》는 좋은 전시는 아니다. 기획자들의 말대로 “복잡한 현상”인 신여성을, 전혀 해석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그들은 “겉치레와 외모에 치중하는 ‘모던 걸’의 대유행”이라는 말을 쓴다. 모던 걸이 겉치레와 외모에 치중했는지, 혹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런 혐의를 씌웠을 뿐인지를, 그들은 탐구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전시 구성은 그래서 난잡하다. 신여성들의 외관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한 1부에 걸린, 그들과 연애하거나 결혼했던 유명 남성 작가들의 작품이나 편지들은 신여성들을 당대의 역동적인 주체로 재해석하는 대신 주류적인 (남성의) 욕망의 대상, 주류적인 (남성의) 움직임의 부수현상 정도로 머물게 두고 만다. 극단적으로 안석주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이른바 ‘만평’ 속에 묘사된 채 아무런 해석도 항변도 없이 전시되는 여성들은, 여성혐오에 아무런 방어 없이 노출된다.
2부는 신여성들의 작품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내용 없기는 매한가지다.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 등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이들의 작품이 여럿 걸리고, 그와 함께 자수 작품들을 주요한 한 축으로 내세운다.2 빠지는 데 없는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해석의 부재는, 시각적인 즐거움 이상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저 ‘이런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있었다’ ― 극단적으로 바꾸어 쓰자면 ‘이만큼 손재주 좋은 이들도 있었다’ 이상의 말을 건네지 못한채, 2부는 끝나고 만다.
3부는 1, 2부의 단점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획자들이 자신들의 해석을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평면적이다. 화가 나혜석, 무용가 최승희, 음악가 이난영, 문학가 김명순, 운동가 주세죽 등 여러 분야의 쟁쟁한 인물들을 내세우지만 이들에 대한 소개는 백과사전 수준에 그치며 같이 걸린 현대 미술 작품들은 이들에게 주목을 끄는 조명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신여성 도착하다》라는 제목은 썩 적절하다. 당대의 관점이 아니라, 지금의 관점에서 말이다. 사료로서 그들은 이제 막 도착했을 뿐이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료들에 대한 추가적인 발굴, 그들에 대한 재해석, 그를 토대로 한 현대에의 말걸기 ― 이 모든 것이 아직 해야 할 일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기획자들은 “신여성에 ‘대한’, 그리고 신여성에 ‘의한’ 작품·자료를 망라한 이번 전시를 통해 20세기 여성 중심의 문화사를 역동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계기가 되기”가 그들이 하고자 한 전부라면, 그들은 모두 이룬 셈이기는 하다.

  1. 이하에서 인용은 모두 전시 리플렛.
  2. 기획자들은 여기에 “근대기 여성들에게 화가가 된다거나 도화교사가 되는 것은 잊혀졌던 자기를 찾는 행위이며, 자기의 능력을 자각하는 행위이자, 여성에게 허용 가능한 사회적 활동이었다”, “해방 이후 자수가 미술의 영역에서 배제됨에 따라 수많은 여자미술학교 출신들의 자수 관련 활동이 근대미술의 역사 속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은 근대기 한국미술의 또 다른 이면이다” 정도의 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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