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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옥진 ― 무기물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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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옥진.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어릴 적 ― 아마도 스무 해 전쯤 ― 어느 시詩를 통해서였다. 기억하지 못하므로 다시 찾아 읽어 보았는데, 이렇다 할 정보가 담겨 있진 않았다. 그가 유명한 춤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후일 티브이를 통해서쯤이었을 테다. 흥미가 갔지만 나는 게을렀으므로 더 찾아 보지는 않았고, 어느덧 그를 잊었다. 유명한 연예인이 그의 손녀뻘이라는 기사, 혹은 그가 풍을 앓고 있다든가 결국은 세상을 떴다든가 하는 기사로 그를 다시 떠올린 것은 또 한참 후의 일이었다.
구하기 쉽고 질이 좋은 기록 영상 같은 것은 흔치 않기에, 뒤늦게 든 그를 알고 싶은 마음은 채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이야기의 方式, 춤의 方式 ― 공옥진의 병신춤 편〉(공동창작 그린피그, 연출 윤한솔,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2018.10.04-14.)의 홍보물이었다. “전통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전통을 현재화하는 방식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자료에는 키네틱 센서를 통한 실험이 어쩌고 하는 지루해 보이는 말들과 함께 “공연에는 공옥진의 수제자들이 등장한다”라는 문장이 있었다.1
그래서,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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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를 강조한 극, 그의 삶을 되새기는 극은 아니다. 이리저리 팔려 다닌 ― 그러던 중 춤이라는 것을 접하게 된 ― 그의 삶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배경막에 그가 춤을 가르치며 한 말들이 흐르긴 하지만,2 주가 되는 것은 여러 배우들이 춤을 추는 장면들이다. 키네틱 센서를 활용해 영상 속 캐릭터의 춤을 연습하는 장면, 키네틱 센서를 활용해 영상 속 공옥진 캐릭터의 춤을 연습하는 장면, 이런 것들이 이어진다.
이 “작품은 공옥진의 ‘병신춤’을 키네틱 센서를 이용한 게임으로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한 발상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탐구 과정에는 한국사의 질곡 속에서 공옥진이 춤을 배우는 과정과 춤이 발생되는 지점, ‘병신춤’이라는 형태에 대한 고민, 키네틱 센서가 읽어내는 것과 읽어 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통시적 고찰이 녹아있다”고도 한다.3 그의 춤을 기록한 영상을 탐구하고, 그것을 전산화해 3D 캐릭터의 움직임으로 재현하고, 또 그것을 무대 위의 실제 인물이 흉내내는 과정은 “‘병신춤’이라는 형태에 대한 고민”이 어떤 식으로 수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무대에서 보이는 것은 “키네틱 센서가 읽어내는 것과 읽어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기보다는, 센서 앞에 서서 캐릭터의 움직임을 흉내 내는 배우들이 ‘읽어 내는 것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소 뻣뻣하고 단순하게 입력된 움직임을 보며 그들은 자신의 것을 덧댄다. 사지를 움직이는 속도나 각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무표정한 캐릭터를 보며 그들은 어떤 표정을 만들어 덧입힌다.
불안하게도 그들은 장애인을 잘 흉내낸다. 사지와 몸통과 얼굴의 근육을 일그러뜨리고, 불규칙하게 숨과 소리를 내뱉는다. 인간극장 류의 다큐멘터리나 혹은 어떤 영화들에서 보아 온 장애인의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도, ‘코미디’의 것과는 약간은 달라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도 입장이 금지된 공연이었지만, 누군가 중간에 들어왔더라면 무대 위 인물들의 장애가 연기된 것이라는 것을 금세는 못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4
앞 단락을 쓰면서 나는 부러 ‘장애인들’이 아니라 ‘장애인’이라고 썼다. 그들의 관절은 비슷한 방식으로 굽고, 그들의 표정은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그들이 그 연기를 위해 본 것은 아무래도 여러 장애인들의 생김새와 움직임이기보다는 공옥진의 연기였던 모양, 이라는 생각이 들고 만다. 공옥진을 회상하고 공옥진을 되살리려는 ― 그 불가능성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 극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다. ‘형태’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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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생인 그가 한창 춤을 배우고 만들었을 무렵에 TV 같은 것은 흔하지 않았을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거나 그는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며 ― 팔려 다니던 그가 한때 정박한 것은 다리 아래에 모여 살고 거리에서 걸식하는 생활이었다 ― 그들의 움직임을 배우고 연구했다, 고 나는 배웠다. 내가 그에게 흥미를 가진 것은, 그가 자신의 삶으로써 배운 타인의 삶을 무대에 올렸다는 데에, 무대에 오를 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것을 기어코 무대에 올렸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5
그런 그의 춤을 “현재화”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동네 바보 형’이라는 캐릭터가 한 채널 건너 한 채널마다 나오는 이 시대에, 병신이라는 말이 너무도 가벼운 욕지거리로 통용되는 이 시대에, 그의 춤이 갖는 ‘형태’란 과연 무엇일까. 딸이 많으면 뭘해, 내가 제일 예쁜데, 라고 말하는 뚱뚱한 배우를 향해 나머지 모든 배우가 놀란 눈을 하고 고개를 휙 돌리는 장면으로 관객들을 웃기려 드는 극이 고민하는 병신춤의 형태, 병신춤의 현재화,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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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도 못하는 사람인 그를 굳이 추켜세우고 강변할 일은 아니다. 다만, 어쩌면 그의 춤이 오늘날 개그콘서트의 유머 코드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것이라 하더라도, 그저 우연의 연속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일 뿐일지라도 어쨌든 그렇게 흘렀던 그의 삶에서, 이 극이 보여준 것과는 다른 지점들에 지금의 우리가 따지고 배워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납득할 수 없는 장면으로 극은 끝났다. 무대 한쪽에 배우 하나가 선다. 맞은 편에서 배우 하나가 나온다.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허리를 휜 그 배우는 이윽고 팔을 접고 얼굴을 찌푸린다. 발목을 꺾고 발끝으로 비틀비틀 걷기 시작한다. 맞은 편까지 그렇게 걸어가 그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한다. 나를 보지 마세요. 나는 춤을 출 거에요. 당신은 울게 될 거에요.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래도 좋다면, 나를 보세요. 그리고 다시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그의 춤이다. 하나씩, 하나씩, 배우들이 등장해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6 한차례 춤판이 끝나면, 홀로 서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역시도 같은 말을 하고 자신의 춤을 춘다.
마지막에 대사를 하던 배우의 목소리는 조금 잠긴 것도 같았지만, 객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왜 울게 될 것이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장애인의 춤, 은 슬픈 것일까. 억척이니 끈기니 하는, 투쟁이니 싸움이니 하는, 명명들이 아닐까 ― 그 슬픔이 있는 곳은 말이다. 무대 위 사람들이 흉내 내고자 했던 움직임을 가진 장애인들을 만나며 내가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춤 출 수 없었던 그들의 일상 ― 시설에 갇혀서는 강제로 진정제를 먹고 종일 누워 있어야만 했던 어떤 이들의 일상, 혹은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 없으므로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어떤 이들의 일상 ― 에 대해 들어야 했던 때밖에 없었다.
관극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최근 전시를 열었다는 어떤 장애인의 인터뷰를 읽었다. 최근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한, 김원영의 말이다. “그냥 조촐하게 작업한 거예요. 새로운 예술적인 소재를 찾는 작가와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창작자들이 모여 하는 퍼포먼스일 뿐이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한다고 해서 이 전시회에 너무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 같은데요.”7
나는 매사에 사회적인 의미가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이 문장들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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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물을 떠올렸다. 공옥진이 세상을 떠난지도 한참이므로 ― 그의 장례가 어떻게 치러졌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 그의 흔적은 지금쯤 무기물이 되었을 테다. 무정물과 다른 말 같이 보이지 않지만 무기물은, 썩어 가는 유기물에서 흘러 나와 다른 유기물들의 삶에로 흡수된다. 그렇게 돌고 돈다. 그의 춤은 무기물이 되었을까. 다른 춤들, 다른 삶들에 흡수되어 그들의 “현재”와 하나가 되는, 그런 무기물이 되었을까. 여전히 썩지 못한 유기물로 굳어 있는 것은 아닐까, 슬픈 마음이다.
예술의, 혹은 어떤 작품의, 형태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춤이 발생되는 지점”을, 혹은 그 앞뒤의 과정을 담을 수 있는 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어떤 것의 명맥을 잇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나는 순진한 사람이므로 그저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아는 한 석년의 공옥진에게는 제자가 없었고 말년의 공옥진에게는 춤을 보여 줄 힘이 없었다. 꽤 젊어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이 진짜로 공옥진의 제자인지, 아니면 공옥진의 제자로 분한 이들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2.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 역시, 어떤 기록물의 인용인지 아니면 이번 극을 위해 창작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시종 높임말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3. 앞서 언급한 홍보물에서 인용.
  4. 그러나 실은, 관객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웃지만 않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대개가 아는 장애인은 웃는 존재가 아니므로.
  5. 그가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것을 좋아했다는, 갖가지 동물들 또한을 흉내 내어 춤췄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으므로 나는 불안하다. 어쩌면 이것은 그를 모르는 이의 섣부른 낭만화일 것이다.
  6. 그들이 장애인들이 아닌 장애인을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은 여기에서 확신을 얻는다. 모두가 근육이 굳은 장애인을 연기하는 가운데 단 한 명만이, 굳이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시각장애인을 연기한다. 다른 장애는 없다는 듯 빠르게 움직이지만, 중간중간 그는 다른 배우들과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7.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865371.html에서 인용한 것이다. 링크만 달랑 적어두는 것은 기사 제목을 정한 사고의 과정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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