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게으른, 그러나 온전한 한 관찰자에 대하여

나는 이제 그를 평범한 소설가로 여긴다. 그러니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아 재미있는 이야기로 쓰는 사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꾸준히 제 주변을 탐색한다는 점일 테다. 도시, 여성, 그런 키워드들. 이제 그렇게 여긴다, 는 것은 그가 변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그를 읽는 방식이, 아니 그에 대해 내린 판단이 변했다는 뜻일 뿐이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문학과 지성사, 2003)를 통해 처음 그를 접했다. 아마도 책이 발간되고 서너 해가 지난 후의 일이었을 테다. 이제는 오래 전이므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동명의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 뿐이지만, 전반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아마도 동시대 남성들의 허세와 위선을 꼬집는, 그리고 그런 그들을 농락하며 작게나마 제 자리를 얻어 가는 동시대 어떤 여성들의 일상을 그리는 글들이었을 테다. 홍보자료나 리뷰 기사 같은 데서 ‘발칙함’ 같은 말들도 표현된 글들이었을 테다.
직접적인 비판, 혹은 더 나은 삶의 묘사, 이런 것들 대신 꼬집고 비꼬는 방식으로 나름의 싸움을 해 나가려는 이라고 여겼다. 꼭 어느 쪽이 더 나은 저항의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그리고 그러한 비꼼에 썩 재능이 있어 보였으므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몇에게 책을 권했고,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리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었던 시점에 이미 나와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로부터 한두 해 후에 읽었던 것 같다. 그의 첫 장편이라는 『달콤한 나의 도시』(문학과 지성사, 2006)는 여전히 어떤 센스랄 만한 것은 있었지만 썩 끌리는 ― 잘 읽고 이해하고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다음 해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문학과 지성사, 2007)은 일부만을 읽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책에 실린 「삼풍백화점」을 읽을 때였던 것 같다, 왜 이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 더 이상의 호기심이 생기지는 않은 궁금증을 품었던 것은.
그 후로 한동안 잊고 지냈고,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문학과 지성사, 2016)를 읽을 기회가 있었지만 읽지 못했다(책을 주문했던 기억이 나는데, 읽지 않고 누군가에게 선물해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발간된 길지 않은 장편 ― 중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기준을 알지 못한다 ―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현대문학, 2018)를 읽었다. 내지에 실렸고 표지에도 일부가 실린 이소연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정이현의 소설은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면서 저지르는 죄악들이 채무처럼 우리의 삶을 포박하고 종재는 미래를 열어나갈 아이들의 삶마저 위태롭게 만들 것임을 두렵게 경고하고 있다”는데, 표지에 실린 이 문장이 그다지 와닿지 않아 작품해설 전문을 읽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서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다만, “두렵게”라는 말을 쓰기에 이 소설은 많은 면에서 ― 그러한 경고를 위해 ‘아이’를 소환하고 그에게 어떤 순수함을 부여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 구성 전반에 새로움이나 섬세함이 부재하는 점에 이르기까지 ― 큰 힘이 없어 보인다. 크게 재미있지도 않고 교훈적이거나 충격적이지도 않다. 그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곤 하지,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살아가곤 하지, 하는 몇 마디 뇌까림이면 책을 덮고 일상으로 돌아가기에, 책을 펴기 전까지의 일상을 그대로 이어가기에, 족하다.
그렇다, 나는 이제 그를 평범한 소설가로 여긴다. 적당히 흥미로운 소재를 찾아 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는 사람. 다만 ‘도시의 젊은 여성’ 쯤으로 일단은 쓸 수 있을 어떤 자리 주위를 꾸준히 관찰하는 사람. 하지만 조금 더 읽어 보려 한다. 궁금한 점이 생겨서다. 작정하고 비판하려 드는 것이 아닌, 그러나 끝내 어떤 비판을 하게 되고 마는 관찰자의 자리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다.
외부적 관찰자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실은 내부에 있다. 어떤 현상을 생경하거나 이상한 것인 양 제시하지만, 그것이 생경하거나 이상한 것이 되게 만드는 이면의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찰도 고민도 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다 알면서도, 혹은 저도 모르게, 내부에 머묾으로써 결국은 지금 이대로의 세상을 옹호하는 이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어렴풋이나마 정이현은 그렇지는 않다고 느낀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전면에 등장하는 영악한 여성들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남성들의 부당한 권력을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내부에 머무는 이들이 당연한 것으로, 따라서 정당한 것으로 보고 마는 무언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태도, 그런 ‘당연함’이라는 틀 바깥으로까지 물러나는 보다 깊은 관찰자의 태도, 그것이 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책에서도 같은 무언가가 견지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으므로, 조금 더 읽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다음 번에 읽게 될 그의 글도 지루할는지 모른다. 그 때에도 나는 아마, 다른 관찰자들이 아직 보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 남들이 모르는 어떤 거대한 영역, 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찾아 나서는 보다 열정적인 관찰자를 기대할 것이므로 말이다. 허나 제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이 게으른 관찰자에게서도, 관찰자에게 필요한 어떤 태도를 또 배울 수 있을 것이므로, 정이현을 나는 조금은 더 읽어 보려 한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