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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렉트라》를 넘지 못한 《엘렉트라》

고전적이고 잘 다듬어진 연극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택했다. 《엘렉트라》(소포클레스 원작, 고연옥 각색, 한태숙 연출, 서울: LG아트센터, 2018.04.26.-05.05.)는 아가멤논 왕의 복수를 하는 엘렉트라 이야기를 현대의 어딘가를 배경으로 각색한 작품이다.1 엘렉트라는 총을 들고 지하 아지트에서 반군을 조직해 아이기스토스에 맞서고자 한다. 폭탄과 집단이 등장함으로써, 엘렉트라의 복수극은 전쟁의 명분을 묻는 싸움이 된다. 몇 가지 논점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삶에 대해 묻고, 한편으로는 복수와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묻는다. 대의 앞에서 개인이 어떤 삶의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 묻는 듯한 장면도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들을 하기에 《엘렉트라》가 적당한 각본이었는지, 나로서는 의심스럽다.2 여성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단선적인 여성상을 가진 이야기고, 싸움의 명분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가족적인 서사를 가진 이야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의 앞의 개인적 결단, 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또한 섬세한 감정선을 살리기 좋지 않은 작품이었다고도 느낀다.
여성의 행복이 어떻게 완성되는 것인지를 묻거나, 그런 식의 행복이라면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장면도, 아이기스토스의 실정을 비판하며 전쟁의 명분을 설파하는 장면도 있다. (개인적 결단을 위해 고뇌하는 장면은 스치듯 지나간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의 대사 이상으로, 이야기 전체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지는 못했다고 여긴다. 오히려 아가멤논, 클리탐네스트라, 엘렉트라, 오리스테스, 아이기스토스 등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주인공들의 관계는 모든 질문들을 가족 갈등이라는 축으로 환원시켜 버리고, 더 이상의 고민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인상까지를 준다.
개인적인 원한, 아니 가족적인 원한 없이 어떤 대의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을 ― 전쟁이라는 방식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 《엘렉트라》는 그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머니와 딸의 갈등 바깥에서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싸움들을 《엘렉트라》는 그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3 강력한 수렴점과 강력한 ― 선입견으로서의 ― 이미지를 갖는 고전 작품을 갱신된 문제의식을 던지도록 각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색된 결말마저도 갈등들을 (어떤 식으로든) 봉합하는 형태를 띤다면, 그렇게 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연출가는 “고전 ‘엘렉트라’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어떻게 현대로 가져올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는데4, 의심과 경계를 찾기는 쉽지 않다. 가족적인 복수극 이상의 이야기를, 가족을 둘러 싼 사랑과 분노 이상의 이야기를 던져보려 (‘던지려’가 아니라) 한 흔적이 없지는 않지만, 흔적 이상의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생각해 본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한 인격의 형성에 중요한 것으로 이야기되는 어떤 일화, 특히 여성 인격의 형성에 중요한 것으로 이야기되는 어떤 일화를 가지고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조금은 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 왜 굳이 현대여야 했을까. 폭탄을 두고 한 ‘웃긴’ 대사 한 번과, 총을 쥐고 벌어지는 긴장감 있는 장면 한두 번 이외에, 이것이 현대의 이야기여야 가능해지는 장면을 찾지는 못했다.
  2. 이 연극이 전적으로 별로였다는 뜻은 아니다. ‘고전적이고 잘 다듬어진 연극’을 보고 싶다는 욕망은 충분히 채워 준 극이었고, 작가나 연출가의 선택 역시 고전에 대한 어떤 취향의 선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주제의식의 전달에 《엘렉트라》가 적합한 수단이었는지 의문이라는 뜻이다.
  3. (연출과 주인공 등 이 극의 주역들의) “공통점은 여성이지만 ‘여성성’이 드러나진 않는다”는 평을 나오게 한다는 점에서 여성에 관한 이야기로서는 이미 실격인지도 모른다. “고연옥 작가는 “‘엘렉트라’는 복수는 정당한 것인가와 개인의 정의가 전체의 정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 연극”이라며 “복수와 정의, 용서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 던지는 방식으로 ‘엘렉트라’를 현재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어 서이숙은 “여성이 많다고 해서 여성성을 강조한 것은 아니”라며 “이 시대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는 말을 찾을 수도 있었다.
    http://www.edaily.co.kr/news/news_detail.asp?newsId=01951606619177760
  4.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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